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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발키리 작전, 발퀴레 작전, 7월 20일 사건] - 1

2009-03-07 21:59:38, Hit : 4505

작성자 : 광개토대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발키리 작전, 발퀴레 작전, 7월 20일 사건]


 


[ 7월 20일 그 날의 혁명군 주역들 - 베를린 ]


 



 


 에르빈 롬멜 : 육군 방위군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혁명의 주역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을 방위군 총사령부  참모로 전임시켰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은 초급장교시절 롬멜장군의 부관이었다.


혁명을 암시적으로 묵인하엿다. 사건후 히틀러는 가족을 살려준다는 조건으로 롬멜 장군에게 자살을 명령한다.


 


  


 


프레드리히 프롬 : 육군 방위군 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자신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인물로 매번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였다.


 당시에 그는 방위군의 사령관이었으며 발키리 명령을 내릴 수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프레드리히 프롬 장군의 결단만 있었다면 혁명은 성공할수 있었다


 



 


 프레드리히 올브리히트 : 육군 방위군 부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  올브리히트 장군 참모


(혁명 실패후 처형됨)


슈타우펜베르크 대령과 육사동기생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 육군 방위군 참모


 (혁명 실패후 처형됨)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발키리 작전)을 사실상 지휘한 인물


 


 


 


 


베르너 폰 헤프텐 :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의 부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루드비히 베크 (Ludwig Beck) : 육군 총사령부 사령관(육군참모총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버그 대령이 초급장교시절 루드비히 베크장군의 부관을 지낸바 있다.


  


 


 


 



 


에리히 회프너 : 육군 기갑사단 사단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에리히 펠기벨 : 육군 통신대 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에르빈 폰 비츨레벤 : 합동참모본부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파울 폰 하세 : 베를린 수도경비 사령부 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오토 에른스트 레머 소령 : 베를린 야전장갑차부대 지휘관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체포하기 위하여 선전부에 들어갔다가


히틀러의 전화를 받고 혁명군을 배반하게 되고 프레드리히 프롬장군과 함께 혁명을 무산시킨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 대령을 혁명군에 가담시키지 않았다면 혁명은 성공할수 있었다. 


 


 7월 20일 그 날의 혁명군 주역들 - 경찰 


 



 


아르투어 네베  : 제국사법경찰(경찰청) 사령관(경찰청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하인리히 폰 헬도르프 : 베를린 경찰서장


(혁명 실패후 처형됨)


 


아르투어 네베 경찰청장과 오랜친구로 경찰청장의 권유로 혁명에 가담하고 혁명에


가담한 경찰 500여명이 히틀러에 처형 당한다


  


7월 20일 그 날의 혁명군 주역들 - 서부전선


 


 


 한스 슈파이델 : 서부전선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슈파이델은 유명한 철학 박사 출신이며 유럽전선으로 온 롬멜의 참모를 지냅니다.


그는 롬멜을 설득하여 반 나치에 참여하게했으며 혁명 당일에는 계속하여 혁명을 이루자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 프랑스지역 군정총독


(혁명 실패후 처형됨)


혁명 당일 프랑스지역 나치 친위대(SS : Schutzstaffel - 히틀러 경호부대)와  게슈타포(Gestapo-독일비밀경찰)를 체포한다


 



 한스 폰 보이네베르크 : 파리 주둔군 총사령관


(혁명 실패후 처형됨)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 군정총독의 명을 받들어 파리의 친위대 무리들을 재빨리 생포하는 공을 세운다.


 


 


 권터 폰 클루게 장군


 (혁명 실패후 처형됨)


 


클루게는 반 나치에 참여한 원수 중에 한 명이며 독일에 대표적인 명장이다.


 그러나 그는 뛰어난 지성을 따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여러 암살기회에서 행동을 주저하며


혁명 당일에도 이 안좋은 성격으로 일을 쉽게 결단치 못한다.


 


 


권터 블루멘트리트 대령 :  권터 폰 클루게 장군 참모


(혁명 실패후 처형됨)


 


 


케사르 폰 호프아커 : 파리지역 공군대령


 


슈타우펜버그의 사촌동생이다.


혁명에 실패하고 케사르 폰 호프아커의 공군사관학교 동기생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숙청당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1944년 7월 20일, 아돌프 히틀러에 반대하는 반나치 인사들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 7.20 쿠데타 등으로도 불린다.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사용했으나 히틀러는 살아남았고, 오히려 대규모 검거 선풍이 불어 많은 장성과 정치인들이 숙청당했다.


 



사건의 배경


 


1933년 나치당 1당 독재 체제를 굳힌 히틀러는 1934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절대 권력자가 되었다. 정계, 관료, 경찰 등 모든 분야에서 그의 심복들 또는 심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나치들을 심었다. 오직 국방군, 그 중에서도 육군의 일부 장교단은 나치에 반발하며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형성했다(민간인 저항 세력은 제외한다). 공군은 헤르만 괴링이 창설하여 이끌었으니 문제될 게 없었고, 3군 중에서 가장 미약했던 해군은 처음부터 정치와 선을 그어 놓고 있었고, 히틀러에게 군인으로서의 충성만을 다바쳤다.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전공을 세워 온 보수적인 경향의 육군을 히틀러는 두려워했고, 그 언젠가 히틀러는 측근에게, "그들은 길들이기 어려운 투견."이라고까지 말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국방군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유언비어로 국방군 장성들의 군복을 벗겼다. 우선 국방장관으로 있던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원수의 재혼녀가 창녀라는 소문을 퍼트려 쫓아내고 이어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취가 동성애자라며 그를 쫓아낸다. 그 후 히틀러는 국방군 총사령관으로 빌헬름 카이텔이 임명되고, 이어 알프레드 요들 상급대장이 국방군 작전부장이라는 요직에 앉게 되면서 마침내 나치는 국방부까지 손에 넣는다.


나치의 이런 행동에 제1차 세계 대전 부터 독일을 위해 싸워왔던 노장들은 앙심을 품고 반나치를 결성한다. 그 중심엔 독일 육군 장성 중에서 가장 존망받는 육군참모총장 루드비히 베크장군이 있었다. 이들은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한다. 그러나 작전을 실행하기도 전에 전쟁이 시작되어 폴란드가 점령되고, 이어 프랑스가 항복하면서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결국 반나치들은 때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마침내 기회가 온다. 1941년, 바바로사 작전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면서 장기전으로 비화되고, 이어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 6 군이 항복하면서 독일이 엄청난 피해를 입자 히틀러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반나치들은 그들의 세력을 은밀히 키워나가면서 히틀러를 암살할 기회를 찾는다. 7.20 사건이 있기 전부터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기도가 자주 있었지만 히틀러는 그 때마다 기적적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6월 6일, 연합군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성공하면서 이들이 기다려 온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발퀴레 작전


 


발퀴레 작전은 간단히 설명해서 독일 내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킬 경우, 국내의 예비군을 비롯한 보충군이 이들을 진압한다는 내용의 독일 군부의 보안령이었다. 반나치 인사들은 이 작전을 자신들이 이용하기로 한다. 그 이유는 이 작전의 발동권을 가지고 있는 예비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프롬 장군의 부관이 바로 반나치의 일원이자 히틀러를 폭사시킬 폭탄을 가지고 가는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1944년 7월 15일, 외국인 노동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명목하에 병력을 동원하려고 했지만, 날짜를 연기해 1944년 7월 20일에 작전을 개시하기로 한다.


작전 내용은 이랬다. 7월 20일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동프러시아에 있는 히틀러의 볼프산체에 들어가 히틀러를 폭사시키면 프롬 장군이(그는 아직 반나치에 들어가는 것을 결정하지 않았다.) 발퀴레 작전을 발동, 예비군을 동원해 나치를 전부 체포하고, 이어 베크 원수를 독일 총사령관으로 추대하고 연합군과 협상해가며 소련을 막는다는 계획이었다.


폭탄은 국방군 정보부(Abwehr)의 사령관인 칼 카나리스제독이 연합군이 레지스탕스에게 전해주기 위해 공수할 때 은밀히 구한 것이었다. 이 폭탄은 파편에 의한 살상이 아닌 화력에 의해서만 살상을 일으키는 폭탄인데 폭탄에 부속된 캡슐을 깨트리면 캡슐의 액체가 신관을 녹이고, 이어 뇌관을 건드리면서 폭발하는 폭탄이었다. 이런 폭탄을 사용한 이유는 볼프산체의 경계가 워낙 철통 같아서 호신용 권총은 물론 결혼 반지까지 전부 내놓고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도저히 금속 폭탄을 사용할 수 없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할 당시 폭탄에 피격당해 오른팔과 왼손가락 3개를 절단하고, 눈 하나를 잃어버린 장애인이었다. 군부에서는 그에게 제대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거부하고 대신 예비군 참모가 된 것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이 힘든 몸으로 매우 정교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매일 이 캡슐을 깨는 훈련을 해야 했다.


 


1. 볼프산체 작전


 


1944년 7월 20일 오전 10시, 예비군 부사령관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이 베크에게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가요?"라고 전화를 걸었다.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한편 오전 7시, 슈타우펜베르크는 이미 그의 부관인 베르너 폰 헤프텐과 함께 랑스도르프의 비행장에서 동프러시아 라스텐부르크 비행장으로 날아갔다. 오전 10시 15분, 라스텐부르크에 도착한 일행은 20분 뒤, 볼프산체에 도착했다. 볼프산체에는 3개의 검문소가 있었지만, 슈타우펜베르크는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한다. 오전 11시,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총통 본영의 참모 멜렌도르프와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정오 무렵에 대기실에서 카이텔을 만나 프롬 장군의 국민척탄병 보고서를 가져왔다고 보고했다. 카이텔은 총통이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이 있기 때문에 일찍 회의를 끝내야 하며 장소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원래는 지하 벙커의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었으나 이 날 마침 재공사를 해야 해서 위층의 개방된 회의실에서 회의를 했던 것이다. 카이텔과 회의실로 가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가는 길에 볼프산체의 통신감인 에리히 펠기벨을 만났다. 벨기벨은 슈타우펜베르크에게 "모든 일이 잘되기를 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의 뜻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 두 사람 뿐이었다.


회의실로 거의 다 가던 슈타우펜베르크는 갑자기 모자와 벨트를 안가지고 왔다며 다시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가방 속의 폭탄 캡슐을 꺼내고 조심스럽게 캡슐을 깼다. 시간은 오후 12시 32분이었다. 폭탄은 예정대로라면 10분 뒤에 터질 예정이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대기실에서 나오자 카이텔은 지각을 했다고 호통을 쳤고, 슈타우펜베르크는 그에게 사과했다.


오후 12시 36분, 회의실로 들어가기 직전, 슈타우펜베르크는 베를린으로부터 급한 전화가 올 것이기 때문에 오는 즉시 알려 주라고 통신 교환수에게 말했다. 이것은 카이텔이 일부러 이 말을 듣게 해서 빠져나갈 길을 미리 만들려는 계책이었다. 당시 회의실 내에는 히틀러를 비롯, 몇몇 장성과 그들의 부관, 타이피스트 2 명까지 해서 총 25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마침 육군 참모총장 호이징거가 동부전선과 이탈리아 전선 상황을 브리핑하고 있었다. 슈타우펜베르크의 등장에 잠시 회의장은 조용해졌으나 금방 무시 당하고 회의는 속행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히틀러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호이징거의 부관 하인츠 브란트 대령과 공군 참모총장 코르텐 사이에 서 있다가 몰래 가방을 히틀러 옆에 테이블 기둥 옆으로 옮겨 놨다. 그리고는 아무도 몰래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폭파까지 이제 5분 남았다. 그런데 아무도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발생했다. 슈타우펜베르크가 나가고 나서 바로 브란트가 지도를 보기 위해 몸을 일으키다가 테이블 기둥 옆에 있던 슈타우펜베르크의 서류가방을 발로 건드렸다. 브란트는 가방 때문에 히틀러가 거추장스러워 할 것이라고 여기고 폭탄을 자기 쪽, 즉 테이블 바깥쪽으로 폭탄을 끌어당겼다. 카이텔은 호이징거 다음이 슈타우펜베르크였기 때문에 그가 있던 곳을 바라봤지만 그는 없었다. 당황한 카이텔은 순간, 회의실로 들어오기 전에 슈타우펜베르크가 베를린으로부터 전화가 올 것이라고 한 말이 떠올라 밖으로 나갔지만, 그곳에도 슈타우펜베르크는 없었고, 결국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오후 12시 42분, 호이징거의 브리핑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막강한 병력으로 주나의 서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선봉은 이미 주나부르크 남서 지구에 도달했으며 페이푸스호 주위의 아군을 즉각 후퇴 시키지 않으면, 파국이..." 이 말과 동시에 폭탄이 터졌고, 순식간에 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카이텔은 회의실 문 앞까지 왔을 때 갑작스런 폭발에 놀라 뛰어 들어갔다. 회의실 내에는 폭탄의 화염이 가득 퍼졌고, 지붕은 거대한 구멍이 났으며 창문은 모두 깨져버렸다.


이 순간, 슈타우펜베르크는 펠기벨의 사무실에 있다가 폭발음을 듣고 펠기벨과 악수한 뒤, 헤프텐과 함께 볼프산체를 떠났다. 검문소를 모두 속이고 마지막 검문소에서 '44분,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통과.'라는 기록을 남긴 채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도망쳤다. 중간에 길가에서 헤프텐은 폭탄이 터지지 않을 경우 쓰려고 했던 제 2의 폭탄을 분해해 길가에 버렸다. 볼프산체의 펠기벨도 통신선을 절단해 볼프산체를 고립시킨다. 오후 12시 55분, 라스텐베르크의 비행장에 도착한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은 비행기를 타고 베를린으로 출발한다.


한편, 폭탄이 터진 회의장은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폭탄을 자기 쪽으로 끌어놨던 브란트와 타이피스트 베르거, 공군 참모장 코르텐, 히틀러 수석 부관 슈문트 등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이외의 많은 사람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히틀러도 얼굴이 새까맣게 탔고, 다리에 약간의 화상과 고막 파열, 그리고 팔에 나무 파편이 박혀 이후 팔에 가끔씩 마비 증상이 발생한다. 기절한 히틀러를 회의장 밖에 있던 카이텔이 뛰쳐들어와 불길을 헤치며 히틀러를 끌고 나온다. 결국 히틀러는 이 불구덩이 속에서 살아난다.


오후 1시 15분, 펠기벨은 예비군 사령부로 전화를 걸어 올브리히트에게 히틀러가 아직 살아 있다고 보고했다. 올브리히트는 당황했지만, 아직 베크와 슈타우펜베르크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기다리자고 했다. 이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갔다. 이무렵, 볼프산체에서는 SS사령관 겸 경찰 총장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사건 현장에 도착해 사건 파악을 위해 베를린에 있는 제국사법경찰 사령관인 아르투르 네베에게 전화를 거나 네베는 사건 조사를 거부한다. 그 사이 펠기벨은 아무도 몰래 볼프산체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볼프산체는 몇 시간 동안이나 외부와 고립된다. 히틀러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처음엔 아무도 슈타우펜베르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 폭발이 연합군의 정밀 폭격이나 이미 오래 전부터 폭탄이 비밀리에 설치된 걸로 여겼으며, 모두 그가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교환수와 카이텔이 슈타우펜베르크가 사라졌다고 했고, 검문소에서도 폭파 직후 슈타우펜베르크가 볼프산체을 떠났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러나 통신선이 절단되었기 때문에 복구될 때까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오후 4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자신이 테러를 당한 회의장을 공개했고, 현재 전황이 이처럼 위험하지만 결국엔 자신이 살아남은 것처럼 결국엔 승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무솔리니는 이에대해 감동을 받고 이 사건이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결국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고 했다. 오후 5시, 무솔리니와의 회담 중에 통신선이 복구되며, 사방에서 반란 소식이 보고되었다. 히틀러는 1934년 SA대장 에른스트 룀의 사건 때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복수를 할 것이며, 애, 어른 할 것없이 모조리 다 죽여버릴 것이라며 분노했다.


 


2. 베를린 작전


 


오후 3시 45분, 베를린에서는 슈타우펜베르크와 헤프텐이 랑스도르프 비행장에 도착했고, 급히 발퀴레 작전이 개시되었다. 오후 4시, 베를린 방어 사령관 파울 폰 하세 장군을 비롯한 반나치들은 친위대 사령부를 봉쇄했고, 올브리히트는 프롬 장군을 찾아가 예비군 동원을 요구했다. 아직까지도 결정을 못하던 프롬은 총통이 죽었는지 증거를 대보라고 했고, 마침 "볼프산체"과 통신선이 복구되어 프롬은 그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마침 전화를 받은 카이텔은 히틀러가 살아있다고 말했고, 프롬은 반란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 먹는다. 올브리히트는 일단 도망쳤고, 그 무렵 베크가 베를린에 도착한다.


오후 4시 30분, 베크,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는 행동을 개시했고, 슈타우펜베르크는 파리의 사촌 동생 폰 호파커에게 파리에서 행동을 개시하라고 했다. 이들은 프롬을 만나 혁명을 같이 할 것을 종용했지만 프롬은 거부하고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려고 하나 대세에 밀려 오히려 그가 체포되어 감금된다.


오후 5시, 슈타우펜베르크를 체포하러 온 친위대 장교와 병사들이 체포되고, 반나치들이 행동을 개시해 베를린의 나치들을 체포한다. 오후 6시, 반란군이 부대를 이동해 친위대와 보안국 사령부를 점령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켰다. 그러나, 오후 6시 28분, 히틀러가 라디오 방송에 나왔다. 히틀러는 방송에서 자신이 살아있으며 반드시 음모자들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고, 이 방송이 나온 이후 음모자들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오토 에른스트 레머는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체포하기 위해 선전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상관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레머는 괴벨스가 히틀러와 전화 연결을 시켜 주자 마음이 변했다. 올브리히트도 크람프니츠 사관학교장인 글레제머 대령을 찾아가나 학교장은 이를 거부한다. 이미 올브리히트에 앞서 오토 스코르체니가 찾아와 그에게 충성에 대해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올브리히트는 그를 감금하고 전차부대를 출동시키나 학교장은 탈출에 성공해 전차대가 티어가르텐 승리의 탑까지 진격했을 때 그들을 제지하고 학교로 복귀시킨다.


레머는 반란에서 손을 떼고 반란군을 체포하기 시작했고, 하세 장군은 동조자를 찾았지만 히틀러가 살아있음이 확인되면서 더이상 반란에 손을드는 사람은 없었다. 헤프텐은 혁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깨닫고 암살기도와 관련된 문서를 소각하기 시작한다. 오후 10시, 반란군에 속했던 장교 10여 명이 갑자기 배신을 하고 반란의 주동자들을 체포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도주하다가 남아 있던 왼팔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끌려갔다. 감금되어 있던 프롬도 구출되었고, 친위대와 보안국을 포위하고 있던 반란군의 헤르푸르트 장군은 히틀러에게 전화해 지금 반란군을 진압하고 있다고 말하며 배신한다.


7월 21일 자정, 이미 반란군과 접선한 것을 덮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던 프롬은 재빨리 군법회의를 열였다. 메르츠 폰 크비른하임, 올브리히트, 슈타우펜베르크, 헤프텐에게 사형이 내려지고 베크는 자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베트는 두 번의 자살 기도가 모두 실패했고, 결국 사살당한다. 사형수들은 뜰로 끌려나와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비치는 가운데 사살당한다. 슈타우펜베르크는 "우리의 신성한 독일 만세!"를 외치며 최후를 맞이했다. 프롬은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또한 죽이고자 했으나 워낙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죽이지는 못했다.


오전 12시 30분, 처형장소에 갑자기 오토 스코르체니 소령이 들이닥친다. 그는 상황을 보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만으로도 뭔가 얻을 수 있을거라 여기고 남아 있던 프롬, 회프너, 에르빈 폰 비츨레벤 원수 등을 현장에서 연행한다. 오전 1시, 히틀러는 라디오 방송에서 매우 분노한 목소리로 반드시 배신자들을 응징하겠다고 하며 베를린에서의 반란은 실패한다.


 


3. 파리 작전


 


파리 시에서도 음모 가담자들이 행동에 나섰다. 그들은 히틀러가 죽었다고 믿었고, 즉시 파리에 주둔하고 있던 게슈타포, 친위대, SD 요원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특히 프랑스 주둔 게슈타포 총책임자였던 카를 오베르크를 체포하는데 안이 된다. 오후 6시, 서부전선 사령관 권터 폰 클루게는 반란자들의 발퀴레 작전을 보고 받는다. 클루게는 베크에게 전화를 걸어 총통의 생사 여부를 물었고, 당연히 베크는 그에게 히틀러가 죽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클루게는 의심을 품었고, 오후 8시에는 라 로슈 기용의 사령부로 발퀴레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령이 내려지나 거부한다. 이에 반란을 일으키자는 권터 블루멘트리한스 슈파이델은 클루게와 심한 논쟁을 벌였다. 이 때, 호파커 등 반란자들이 도착해 이미 게슈타포를 비롯한 나치 일당을 체포했다면서 같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클루게는 거절했다. 클루게가 반란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반란의 실패를 의미했다. 클루게를 비롯한 반란자들은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클루게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것을 권유하나 이들은 거부한다.


오후 11시 30분, 반란군은 1,200여 명에 달하는 게슈타포, 친위대, 보안대 등의 나치 일파를 체포해 형무소에 수감시킨다. 또한 오베르크와 1940년부터 프랑스에 게슈타포를 뿌리박히게 했고, 실질적인 총책임자라 할 수 있는 헬무트 크노헨은 파리 콘티넨탈 호텔에 감금된다. 그러나 21일 오전 1시, 베를린에서의 반란이 실패했다는 히틀러의 성명이 발표되자 반란이 크게 흔들린다. 이후 오전 1시 30분, 독일 서부 전선 해군 사령관 크란케 제독이, 체포된 나치 일원을 석방하지 않으면 해군 육전대 1천 명을 투입해 반란을 진압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오전 2시, 블루멘트리는 파리 군정 사령관 칼 하인리히 폰 스퇼프나겔대장에게 그의 해직을 알린다. 크란케는 계속해서 해군 병력을 투입하겠다고 위협하고 있었다. 이 때 파리 주재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가 중재에 나서며 교전을 막고자 노력한다. 오전 3시, 아베츠 대사는 오베르크와 스퇼프나겔을 중재해 나치 일원의 일제 석방과 반란군의 안전을 원칙으로 한다는 협의 하에 파리에서의 반란도 종료된다. 협상 이후 반란군과 친위대 장교들은 샴페인을 마시며 서로를 위로했다.


 


사건의 결과


 


히틀러는 "배신자"들을 남김 없이 죽여 버릴 것을 명령했고, 나치는 롤란트 프라이슬러 판사를 재판장으로 하는 재판을 열었다. 반란자들 대부분은 이미 혹독한 고문을 당했었고, 재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형이 언도된다. 약 7,000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약 5,000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사형이 언도되었고,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히틀러는 그 모습이 '푸줏간의 돼지' 같다고 묘사했다.


먼저 재판에 선 비츨레벤, 펠기벨, 회프너, 하세, 히틀러에게 폭탄을 가지고 간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 동생들인 호파커, 헬도르프, 베르톨트 폰 슈타우펜베르크 등에게 사형이 언도되었다. 이 중 베르톨트는 벨트 없는 누더기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떳떳하게 행동했고, 그들을 비난하는 재판장을 반대로 비난하며 그의 엉터리 심문을 반박한다. 네베는 사건 당일 도망치나 결국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배신자 헤르푸르트와 프롬도 처형당한다. 사전에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만 갈고리 형이 아닌 총살형을 당했다. 프롬은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럴리 없다."며 배신을 후회했다.


맹목적인 복종으로 배신을 한 레머는 대령으로 승진하나 종전 후,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체포되어 독일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파리에서의 반란에 동조하지 않았던 클루게는 사령관 직에서 해임되고, 총통 본영으로 소환되던 중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블루멘트리는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해 아르덴느 공세에 참가하기도 한다. 슈파이델은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지만 연합군이 수용소를 점령하면서 간신히 살아난다. 그는 종전 후 재건된 독일군에서 복무하면서 반나치 이야기를 펴낸 후 사망한다. 파리에서의 반란에 핵심 임무를 맡던 스퇼프나겔은 게슈타포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자진 출두하던 중 그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싸웠던 베르됭에서 자살을 시도했지만 두 눈만 잃고 치료 받은 후에 처형된다.


이 때, 직,간접적으로나마 암살 시도에 참여한 이들도 있었고, 암살 기도와 무관하면서도 한꺼번에 엮인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에르빈 롬멜이 있는데 롬멜은 클루게와 마찬가지로 히틀러에 의해 청산가리를 마시고 자살한다. 반나치 인사 중에서 민간인으로 가장 유명했던 목사 디트리히 본회퍼도 이 때 체포된다. 반란자들에게 폭탄을 제공했던 정보국 국장 카나리스 제독과 부국장인 오스터 장군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쿠테타 성공 후 수상 자리에 올라 연합군과 협상 할 때 민간인 대표로 나서려 했던 라이프치히 시장이었던 괴르델러는 반란이 실패하자 도망치나 술집에서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추천으로 부수상에 오르려 했던 율리우스 레버는 사회주의자로 반란 전에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가 혐의가 드러나 처형당했다.


나치에 반대했던 정치 세력 중의 하나였던 크라이자우 서클의 회장인 몰트게 백작은 반란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체포, 처형되었는 데, 그중에서도 슈타우펜베르크 가문은 히틀러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슈타우펜베르크'라는 성씨를 쓰는 사람은 모두 처형하라."고 하는 명령을 내리면서 가문이 거의 멸족될 위기에 빠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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