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평화재향군인회(가칭), 평화군인사랑회::

 
 
 
 
 
 
 

HOME > 게시판 > 평군대문글



 (공지)제2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

2008-06-25 08:46:53, Hit : 5150

작성자 : 김환영
 

제2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


1.폭파사건 개요


6.25전쟁발발 이틀 후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교 위에는 수많은 피난민과 차량이 남하이동 중이었음. 그러나 어떤 사전예고의 조치도 없이 다리를 폭파함으로서 추산하여 500~800명의 희생자 발생.


당시 이승만 정부는 국민들의 안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보호에만 급급하여 이미 대전으로 이동한 상태에서 서울을 사수하라는 거짓방송으로 국민들을 속임으로서 피해가 더 컸음.


이 성급한 폭파 사건으로 인하여 민심이 흉흉해지자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어 사형시킴으로서 민심 잠재우기에만 골몰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최창식 대령을 그 후 명예가 회복되었다. 


2.6.25전후 민간인 희생의 유형


가. 친일군경에 의해 사상의 굴레를 뒤집어씌운  무자비학살:


예비검속, 보도연맹. 제주 4.3. 여순, 대전형무소. 임실. 함평. 보성, 문경. 강화. ---100만 명 추산


나. 미군에 의한 피난민 사살:


노근리 사건. 포항 등에서의 전투기에 의한 폭격 및 기총소사 사건 등


다. 정부의 판단착오로 인한 희생:


한강 인도교 폭파 → 유골유실. 증언자 부재.


3.위령제의 목적


 6.25전후하여 수많은 민간인희생 중 유가족이나 연고자가 있는 다른 사건의 경우와 달리 위령제도 없고 진상규명과 교훈을 찾는 노력도 없어, 지금도 구천을 헤매고 있을 영혼들의 명복을 빌어 위로하며, 위란에 처했을 때 국민을 돌보지 않은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역사적 심판과 교훈을 주고자 한다.


4.위령제 개요


가. 일시 : 6월 27일 금요일 11시.


나. 장소: 남쪽 한강대교 밑 노들섬 둔치


다. 참가예정단체: 6.25전후 민간인 학살 유족회. 평화통일을 여는 사람들. 민족문제 연구소. 진보연대. 범민련, 민가협.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촛불예비군, (재)세계불교법왕청평화재단


라. 주관: 평화재향군인회


라. 진행


 1)개식사


 2)국민의례


 3)향불, 촛불점화


 4)축문


 5)추도사


  -한국전쟁전후 피학살자 유족회, 추모연대, 범민련 등등


 6)추도시 낭송


 7)폐회사




<참고자료>




1. 한강 인도교 폭파 일시별 개요


#6월27일(전쟁발발 3일째)


-전세가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면서 수도 서울이 위협


-이날 새벽 대통령이 특별 열차 편으로 대전으로 떠남


-비상 국무회의에서는 정부를 수원으로 이동하기로 결정


-군은 서울을 사수하기로 하고 창동 방어선에 가용한 전력을 집중시켰으나 이 방어선이 붕괴


#6월27일 11시: 긴급 회의


-채병덕 총참모장은 서울 사수를 포기 후


-육군본부의 서울 철수와 함께 한강상의 교량을 폭파하기로 결정


-폭파 시기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입한 2시간 뒤로함


-육군본부는 철수를 개시, 시흥에 있는 육군보병학교로 이동


#6월27일 12시-오후 3시30분: 한강 인도교, 경부선 철교, 경인선 철교 폭파 장치 완료


-그날 미 군사고문단 라이트 대령이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이 곧 한국 전선에 전방지휘소(ADCOM)를 설치한다는 소식과 함께 육군본부를 서울로 복귀 권고


-이에 따라 채총참모장은 육본을 다시 용산으로 복귀시키고 한강교 폭파 연기


-미아리와 회기동을 연결하는 선에서 서울을 사수 결정


-한강상의 각 교량에 설치했던 폭발물도 일부 제거, 차량과 열차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조치


-한강교 폭파 지휘 계통도 총참모장-참모부장(김백일 대령)-공병감-공병학교장으로 확정


#6월27일 밤 11시30분:  폭파 준비 명령 하달


-미아리 방어선에서 공방전이 전개될 무렵


#6월28일 1시45분: 한강교 폭파 명령


-돈암동에 북한군 전차가 진입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총참모장은 공병감에게 폭파 명령


#6월28일 2시30분: 한강교는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절단


-당시 한강교를 건너던 500~800명에 이르는 인원사망


-차량 50여 대가 피해


-서울 지역에 투입됐던 국군 5개 사단과 지원부대의 퇴로 차단


-차량 1318대를 비롯한 중장비와 공용화기들을 한강 이북에 유기


-국군의 주력 4만여 명의 병력이 뿔뿔이 흩어지는 엄청난 결과 초래


-한강교의 조기 파괴로 시민들이 피난 기회 상실


#6월28일 오전 10시: 북한군 전차 한강대교 북단 출현


-교량이 폭파된 지 7시간 반이 지난 후


#9월21일: 공병감 최창식 대령 사형


-한강교의 조기 폭파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치솟자 군은 민심을 수습위해 군관계자 군사 재판 회부


-이 재판에서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을 물어 사형 선고


-64년(14년후) 부인이 제기 항소심에서 그의 조치는 상관 명령에 복종한 것이라고 판단, 무죄 선고




2. 한강대교 개요


-1917년: 한강인도교 준공(철교 개설 17년 후)


-1936년: 현재의 타이드 아치형식의 다리로 개축(남쪽: 381m, 북쪽: 459m)


-1950년: 폭파


-1958년: 복구


-1982년: 기존 인도교 옆에 같은 형태, 같은 규모의 다리가 놓여 쌍둥이 다리가 됨


         (남쪽은 하류에 북쪽은 상류에 신교를 놓음)




3. 대전서 실시한 이승만의 서울사수 녹음방송


1950년 6월27일 오후 7시경 충남지사 관저에서 무초 주한미국대사로부터 미국의 지원의사를 전해들은 이승만은 상당히 고무돼 전쟁 이후 처음으로 대 국민방송을 하게 된다. 물론 이승만으로서는 전쟁이 터진 이후 3일동안 자기신변 보호에 급급해 국민들을 챙기지 못한 점도 있었고 미국참전을 알림으로써 국민을 안심시켜야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의 방송은 전쟁 초기의 혼란상을 극대화해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만을 빚었다.


이승만은 무초와 만난 직후 비서진들에게 방송준비를 지시한다. 그래서 이철원 공보처장이 서울중앙방송국에 전화를 걸어 당직 아나운서를 대기시켰다. 수행비서 황규면의 증언이다.


" 이 박사께서는 무초대사와 만난 다음 국민을 안위하기 위해서라도 방송하는 것이 좋겠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이철원 공보처장도 들어왔습니다. 대통령께서는 나를 보고 방송 원고를 구술할 테니 어서 받아쓰라고 해요. 방송은 그날 밤 10시에 내보내야 하므로 이박사의 구술을 다시 정서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나는 붉은 색연필로 이박사의 구술을 받아썼지요. 그 내용은 대강 un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이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공중으로 군기-군물을 날라와서 우리를 도우니까 국민은 좀 고생이 되더라도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니 안심하라 는 취지였습니다. 문장의 서두를 다듬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박사께서는 즉시 전화수화기에 대고 구술한 원고를 읽으셨지요. 이것이 그날 밤에 나간 대통령의 녹음방송입니다. "(중앙일보사편 민족의 증언 1)


서울을 떠나기 전에 녹음을 해두고 떠난 것이 아니라 대전에서 전화로 녹음방송을 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사전녹음을 했니, 대전에서 전화로 녹음방송을 했니 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이승만이 선의에서 방송을 결심하고 대전에서 전화를 통해 일단 녹음을 한 다음 방송을 했다 하더라도 불과 4시간 후면 적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지게 될 서울의 사정을 전혀 감안하지 않은 채 오후10시부터 서울 사수 방송 을 했다는 것은 서울시민들이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빼앗았다는 점에서 분명 중대한 과오이기 때문이다.


한강다리(철교 셋과 인도교 하나)의 폭파시간은 28일 새벽2시30분경. 중앙방송국이 이승만의 방송을 내보낸 후 북한군에 의해 점령되던 시각과 거의 같은 시간이다.


현재까지 지적되고 있는 한강다리 폭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너무 빨랐다 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의 경우 국군이 평양입성을 할 때 백선엽장군의 제1사단이 대동강 입구에 당도한 시점에서 다리를 끊었다. 반면 우리는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아직 서울에 들어오기도 전에 다리를 폭파하는 바람에 국군의 병력과 장비가 대부분 한강을 건너지 못했고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을 떠나지 못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더욱이 수많은 인파와 차량들이 다리를 지나고 있을 때 폭파를 하는 바람에 수백명의 희생자가 생기기까지 했다.


물론 한강다리 폭파는 이승만이 결정한 것이 아니라 군부의 군사적 결정사안일 뿐이라지만 사안의 중대성에 비춰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시 한강폭파와 관련된 지휘계통은 신성모 국방장관, 장경근 국방차관, 채병덕 참모총장, 김백일 참모부장, 최창식 공병감 등으로 이어진다.


전쟁초기에 빚어진 이승만의 녹음방송과 한강교 조기폭파는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참담한 비극을 만들었고 민심이반에도 크게 작용했다.




4. 제1회 한강인도교 위령제 실시


(민중의소리 |기사입력 2007.07.01 15:50)


"한강은 그날의 비극을 잊은 채 저렇게 유유히 흐르고 있는데..."


한국전쟁 당시 정부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발생한 한강 인도교 폭파사건으로 숨진 민간인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행사가 28일 오후 한강 노들섬 둔치에서 열렸다.


57년만에 처음 열린 행사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한강인도교폭파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새벽 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 자리)를 따라 피난하던 민간인들이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다리가 폭파되면서 희생당한 사건이다. 당시 다리를 건너다 사망한 숫자만 적게는 5백명에서 많게는 8백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다리가 폭파될 당시 이미 정부 수뇌부는 이미 서울을 떠난 상태였다


5.오시는 길


 1)대중교통 이용 시: 지하철1호선 용산역 광장에서 10시부터 행사장까지 셔틀차량 운행


 2)차량이용시 약도 참조








  (하행선으로 진입하여 노들섬에서 개방되는 문으로 진입)





3811
  <조선일보> '천안함 날조기사', 국제적 파문/박태견 기자 
 운영자
3993 2012-01-19
3810
  (공고)2008년 2/4분기 정기 대표단회의 결과 
 김환영
5119 2008-05-01
3809
  (공지) 8월 5일 '부시 OUT! 명박 OUT! 공동행동' 
 김환영
4871 2008-08-05
3808
  (공지)5월 운영위 결과 
 김환영
4587 2008-05-26
  (공지)제2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위령제 
 김환영
5150 2008-06-25
3806
  (공지)제3회 한강 인도교 폭파 희생자 합동위령제 
 김환영
6731 2009-06-24
3805
  (공지)제5차 평군 산행 
 김환영
5171 2008-05-16
3804
  (공지)평군 2008년 7월 운영위원회 결과 
 김환영
4640 2008-07-30
3803
  (공지)평화생협발기인 모임 결과 
 김환영
5013 2008-05-13
3802
  (공지)평화생협발기인모임 
 김환영
5825 2008-05-02
3801
  (안내)백범김구선생서거 59주기 추모 및 경교장 복원 확정 기념식 
 김환영
5119 2008-06-19
3800
  (약칭)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결정문 
 김환영
4807 2008-05-07
3799
  (충격) 새누리당의원, 리얼미터 여론조작 노하우 실토- 일파만파 /속지말자 
 운영자
5449 2012-12-09
3798
  (펌) 임정요인 무덤 간데 없고 잡초·쓰레기만 
 운영자
4178 2009-08-03
3797
  .[시론]목숨만 붙어 오면 살려낸다 /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표명렬
4182 2011-02-01
3796
  1%도 진보적일 수 있다/박 원영 
 운영자
3946 2012-01-13
3795
  1000선붕괴..."경제 나쁜건 아닌데 MB불신이 추락 부추겨 
 관리자
4289 2008-10-24
3794
  10년 만에 컴백한 웬디 셔먼, 한반도 기류 바꿀까/황준호 가자 
 운영자
2980 2011-07-03
3793
  10년 전 <동아> '추석 없다' 보도, 지금 '딱'이네 <오마이뉴스펌> 
 운영자
4809 2010-09-10
3792
  12.6일 국회 앞 기자회견 
 김환영
5180 2006-12-06

[1][2][3][4][5] 6 [7][8][9][10]..[196]



Copyright 1999-2024 Zeroboard / skin by 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