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고] 몇 마디 사과로 ‘역사의 빚’ 청산하고 싶겠지만…
요즘 ‘반전 있는 여자’가 대세다.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에 등장하는 ‘반전 있는 여자’는 글로벌 스타덤에 오르기도 했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잔 여유를 안은 품격 있는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정숙해 보이지만 놀 땐 노는 여자, 이때다 싶으면 묶었던 머리 푸는 여자, 가렸지만 웬만한 노출보다 야한 여자, 그런 감각 있는 여자….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도 ‘반전 있는 여자’를 닮고 싶은가보다. 요즘 박 후보의 반전이 자못 어지럼증을 일으킬 정도다. 그동안 줄곧 ‘구국의 결단’이라거나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할 문제라고 일관 했던 5·16쿠데타와 유신, 인혁당 사건을 갑자기 헌법가치 및 민주주의 훼손 사건이라며 사과하고, 봉하마을과 4·19묘역을 찾고, 김대중기념사업회 토론회에 참석하고, 전태일 재단 방문을 시도하고….
과거사에 대한 반전이 가장 눈에 뛴다. 박 후보는 지난달 10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연했을 때까지만 해도 “(유신에 대해서는)몇 십 년 전 역사라 지금도 논란이 있고 다양한 생각이 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역사가 객관적인 판단을 해 나가지 않겠는가, 역사의 몫이고 국민의 몫이라고 생각한다”며 아버지를 적극 두둔했다. 그러다가 불과 2주 후인 24일 여의도 새누리 당사 기자회견에서는 "5·16과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며 물러섰다.
이처럼 한동안 좌클릭 광폭 행보를 하는가 싶더니 느닷없이 극우단체 전진대회에 참석해 참여정부의 북방한계선(NLL) 문제를 매도하고, 선진통일당과 합당을 선언하는 등 가파른 우회전 행보로 돌아선다. 언제 ‘국민대통합’을 외쳤나싶게 ‘보수대통합’으로 홱 말을 바꿔 탄다.
연일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고, 자신이 한 말을 며칠 만에 뒤집는다. 한 쪽으로 사과하고 다른 쪽으론 상처를 안기기도 한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으니 ‘반전 있는 여자’인지 ‘억지춘향’인지 헛갈린다. 대선후보에게 마땅히 요구해야 하는 과거사 검증이라도 할라치면 “우리의 큰 방향은 과거보다 미래를 향해야 한다"(지난달 5일 선거대책기구 관계자 임명장 수여식장)며 못 마땅해 하더니, 돌연 “역사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역사의 보복을 받는다는 말이 있죠”(지난 24일 서울 서초구 매봉동 EBS)라며 말을 바꾼다.
오락가락 하다보면 반드시 자충수를 두게 마련. 정수장학회 문제가 딱 그런 경우다. 아버지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를 해 놓고는, 그 피해자 중 하나인 김지태 전 부일장학회(현 정수장학회) 소유주에게 다시 심한 상처를 안긴다.
박 후보는 지난 21일 정수장학회 문제와 관련 “고 김지태씨는 부정부패로 지탄받던 사람으로,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힌 것”이라며 기존의 ‘강탈’ 논란을 일축했다. 그는 이어 "안타깝게도 당시 김씨는 부정부패로 많은 지탄을 받았다. 4·19부터 부정부패 명단에 올랐고, 분노한 시민들이 집 앞에서 시위를 할 정도였다. 5·16때 부정부패로 징역 7년형을 구형받았는데,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 더해 박 후보의 측근들은 고 김지태씨가 친일파에 부정축재자였다는 주장까지 제기했다.
아뿔싸, 그나마 과거사 사과를 통해 조금 따놓은 점수를 한 방에 까먹는다. 우선 법원에서 강탈로 인정한 것을 헌납이라고 강변했고, 확인되지도 않은 사실로 고인의 명예를 훼손 했으며, 설혹 친일파나 부패자의 재산이었다 할지라도 법을 통하지 않고 총으로 빼앗은 만행을 정당화했다는 비난이 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박 후보의 입장에서는 돈 안 들이고 말로 때우는 사과는 할 수 있어도, 막대한 재산이 왔다 갔다 하는 정수장학회 문제에서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속내를 내보인 건 아닐까.
아무래도 박 후보는 아버지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인생은 그야말로 반전과 변신의 연속이었다. 그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 원래 문경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일본천황에게 바치는 충성맹세 혈서까지 쓰면서 만주군관학교에 입학을 한다. 이름마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바꾼다. 이후 만주군관학교 수석졸업, 일본육사 3등 졸업, 만주일대 대한독립군 토벌 등 제국의 군인으로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천년만년 욱일승천 할 것으로만 알았던 일본의 패망. 다카키 마사오 중위에겐 청천벽력 이었을 것. 그러나 다카키 마사오 중위는 어느새 국군복으로 갈아입은 박정희로 변신을 했고, 당시 시류에 따라 남로당 활동을 시작한다. 남로당 군사책으로 암약하던 그는 여순사건 당시 검거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는다.
여기서 또 다시 박 전 대통령의 놀라운 변신술이 실력을 발휘한다. 남로당 동지들의 명단을 깡그리 넘긴 뒤 자신만 살아남은 것이다. 현역에서 은퇴 후 문관으로 활동하던 그는 6·25의 발발과 함께 다시 소령으로 복귀한다. 이후 5·16 쿠데타와 유신독재 등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바꾼다. 권력욕과 출세욕에 사로잡힌 그에게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동료, 원칙과 신뢰 등은 언제라도 버릴 수 있는 헌신짝일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반면, 박 후보는 아버지와는 달리 어설프다. 최근 지지계층 외연확장을 위해 ‘반전 있는 여자’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지만 잘 먹히지 않는다. 아버지처럼 반전이나 변신, 혹은 배신에 능하지도 못하고, 억지춘향 연기도 자연스럽게 해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달 24일 부산 대통령선거대책위 출범식에서 선보인 박근혜의 ‘말춤’ 솜씨만큼이나 그의 좌클릭 혹은 대통합행보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도 언제 그랬나 싶게 보수 우익 세력의 품으로 순간이동을 하지만….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리자.” 지난 26일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33주기 추도식에서 박 후보가 한 말이다. 박 후보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에겐 그 당시 절실했던 생존 문제를 해결하고 이 나라를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이자 철학이었다. 그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와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린다. 아버지 시대에 이룩한 성취는 국민들에게 돌려드리고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는 제가 안고 가겠다"고 했다.
결국 그동안 박 후보의 우왕좌왕, 억지춘향 행보는 불편한 과거사를 서둘러 마무리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것인가. 혼자 그 시대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가겠다고?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제대로 된 재판도 받지 못한 채 빨갱이로 몰려 사형을 당한 민주투사들, 컴컴한 밀실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고문을 당하고 병신이 된 노동운동가들, 수탈을 견디다 못해 제 몸에 시너를 끼얹고 분신을 한 노동자들,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총부리 앞에서 강탈당한 사람들, 귀중한 수업시간에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며 전체주의를 강제 주입받았던 그 숱한 학생들….
박 후보는 이런 희생자들의 피맺힌 원한과 응어리들을 어떻게 안고 가겠다는 것일까. 설마 진정성도 인정받지 못하는 공허한 사과 몇 마디로 그 어마어마한 역사의 빚을 털어버리겠다는 것인가? 진정성과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말뿐인 억지춘향은 그저 허무개그일 뿐이거늘.
아직 박정희를 놓아 줄 수 없다. 그의 철권통치로 인한 희생자들과 유족들의 피눈물이 아직도 철철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으로 박정희를 놓아 주는 건 그 희생자들의 권한이지, 가해자 딸의 일이 아니다. 겉만 번지르르한 사과 몇 마디로 무겁고 참담한 ‘역사의 빚’을 청산하긴 어렵다. 먼저 진심으로 희생자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고,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행동을 보이는 게 순서다. 그 피해자들에게 어떤 보상과 위로를 해 줄 것인지 구체적인 방안을 내 놓는 게 도리다.
적어도 박정희 18년 철권통치의 장물들인 정수장학회와 한국문화재단, 영남학원, 육영재단 등 불의한 재산은 몽땅 사회에 환원하라. 아버지로 인한 희생자 및 유족들의 상처와 아픔을 조금이나마 치유하는 데 그 장물들을 사용하겠다고 약속하는 건 어떤가. 알맹이 없는 ‘반전 있는 여자’ 보다는 ‘그런 감각 있는 여자’가 훨씬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지 아니한가.<미디어오늘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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