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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유와 성찰]공적 언어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

2013-01-19 05:33:30, Hit : 3942

작성자 : 운영자
- Link #1 : khan_art_view.html?artid=201301182127385&code=990100

평생학습 시대를 맞아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배움의 장이 마련되고 있다. 그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강연이다. 강연회에는 사회자가 있다. 그의 역할은 강사를 소개하면서 청중이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드는 일이다. 사회자가 그것을 잘해내면 강사도 긴장을 크게 덜 수 있다. 첫 대면의 낯섦과 서먹함이 풀리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자는 소통의 촉매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관청이 주최하는 강연회에서는 그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사회자에게는 미리 대본이 주어지는데 내용이 천편일률적이다. ‘바쁘신 가운데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시간 강의를 맡아주실 분은 (…) 강사님이 나오실 때 큰 박수로 맞아주시기 바랍니다.’ 대다수 진행자는 이런 ‘문서’를 또박또박 읽어 내린다. 특히 수강생 가운데 한 명이 선정되어 진행을 맡는 교원 연수나 공무원 교육에서 거의 그렇게 한다.






 
그것은 정보의 전달이지 소통이 아니다. 거기에는 자기의 말이 전혀 없다. 청중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 식으로 소개받은 강사는 신이 나지 않는다. 청중의 표정이 굳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리 부탁할 때가 많다. 그렇게 딱딱하게 읽지 말고, 자연스럽게 말문을 열어달라고 주문한다. 멋지게 말하지 않아도 좋다고, ‘점심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오늘 날씨가 많이 춥죠?’처럼 친구를 만났을 때 건네는 친근한 인사로 시작하면 된다고 안심시킨다. 하지만 대개 그분들은 곤혹스러워하면서 그냥 주어진 방식대로 한다.

한국의 공적인 의례에서는 생동하는 언어를 접하기가 어렵다. 행사에 빠지지 않는 인사말이나 축사를 보자. 고위 공직자들은 자신의 발언 순서나 자리 배치에는 민감하지만, 그 메시지의 품격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부하 직원이 써준 글을 무미건조하게 낭독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들 앞에 얼굴 내밀고 사진 찍는 것에 골몰하는 높으신 양반들이 판에 박힌 식사(式辭)를 연거푸 늘어놓는 가운데 참석자들은 지루하고 짜증이 난다. 민주화 시대가 열린 지 오래지만, 정치와 행정의 권위주의 문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인간에게 공공 영역은 무엇인가. 국가와 시민사회의 토론과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제도가 작동하는 토대다. 그런데 공공 영역의 의미는 그러한 효용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간에게 고양감과 충만함을 불러일으킨다. 콘서트장이나 스타디움은 관객들에게 즐거운 긴장을 자아낸다. 사사로운 세계에서 경험하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를 만나기 때문이다. 익명의 타자들과 느낌을 나누고 의미를 공유하는 기쁨은 사뭇 크다. 토크 콘서트가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까닭, 바로 공감과 소통이다.

그것은 화술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을 감동시키는 것은 언어의 기교가 아니다. 안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감정, 사물에 대한 신선한 통찰, 정밀한 개념과 간결한 표현, 맥락에 걸맞은 예화, 산뜻한 유머 감각, 상대방의 심경을 섬세하게 헤아리는 이해력 등이 배합될 때 마음은 움직인다. 그것은 고위 공직자들에게 요구되는 능력이나 자질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지위에 따라붙는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일 자체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열망으로 정진하는 ‘영혼이 있는’ 지도자는 언어를 통해 그 기운을 자연스럽게 퍼뜨린다.

이제 2월이면 학교마다 졸업식이 열린다. 대통령 취임식도 예정되어 있다. 그 의례들의 핵심을 이루는 축사와 취임사가 상투적이고 따분한 요식행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구성원들의 소망을 공동의 높은 뜻으로 모아내고 소속집단에 대한 자부심을 북돋는 울림을 기대한다. 참석자들의 마음속에 오래 남고 그 시공간을 넘어 역사적으로 종종 되새겨지기까지 하는 명연설들에는 그런 힘이 있다. 위엄을 갖추었으되 경직되지 않고 가슴을 뛰게 하되 경박하지 않은 수사학, 그것은 한 사회가 빚어내는 공적 행복감의 표현이다.<경향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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