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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발전소 짓기도 전에 핵무기가 갖고 싶었다/한홍구

2013-02-03 06:34:21, Hit : 4659

작성자 :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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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한홍구의 유신과 오늘
<28>박정희의 원전 사랑

2012년 18대 대통령선거는 이웃 일본에서 발생한 3·11사건 이후 첫 대통령선거였다.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인류의 재앙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형 원전을 파는 기회로 생각한다”며 “이번 사고를 오히려 원전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쿠시마 사태 이후 전세계가 속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 탈핵을 모색하는데 이명박 대통령만이 홀로 ‘원전 르네상스’를 외치는 것은 그가 현재 한국에서 가동중인 23기의 핵발전소 중 12기의 건설에 직간접으로 참여한 ‘원자력 마피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18대 대통령선거에서 문재인 후보는 명시적으로 탈핵 입장을 표명했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뚜렷한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2년 4·11 총선 당시 비례대표 1번에 원자력공학 전공자를 추천한 것이나, 인수위원에 핵발전 추진론자들이 들어간 것을 보면 새 정부가 탈핵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에 역행할 것이라는 우려를 떨칠 수 없다.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후쿠시마의 재앙은 지난 대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만큼, 한국인의 핵 불감증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다. 하긴 1945년의 원폭 투하로 일본 민족 다음으로 무려 4만명이 희생되어 크나큰 피해를 보았음에도 핵폭탄을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준 고마운 무기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니 그 불감증을 어이하리오.


아톰과 고질라, 착한 핵과 나쁜 핵

1953년 12월8일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유엔총회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강조했다. 소련이 수소폭탄실험(1953년 8월12일)에 성공하여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독점이 깨진 지 채 넉달이 되지 않아서였다. 당시 소련은 중국, 폴란드, 동독, 체코, 루마니아 등과 농축우라늄과 원자력 기술 제공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원자력협정 체결을 준비중(1954년 1월 체결)이었다. 아이젠하워는 핵과 관련된 핵심기술이 공산진영 내에 곧 전파될 상황에 놓이자 그동안 미국이 견지해 온 핵에 관한 철저한 비밀주의를 포기하고 적극적인 정보 공개에 참여한 것이다. 이는 “이미 핵무기용으로 생산이 포화 상태에 이른 미국의 우라늄 농축제품을 처리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아이젠하워가 군비 확장과 핵무기 증강을 감추기 위해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성명을 발표할 때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생각한 것은 일본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는 일본”이 핵을 둘러싼 미국의 세계 전략에 적극적으로 호응한다면 미국은 어디든 핵발전을 팔아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피폭국 일본이 세계 3위의 핵발전 대국으로 변신하는 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사람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쇼리키 마쓰타로이다. 레이건, 전두환과 함께 1980년대 한·미·일 삼각 극우동맹을 이끌었던 일본 총리이던 나카소네는 해군 장교 시절 멀리서 히로시마의 원폭구름을 보면서 “앞으로는 원자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버섯구름 밑에 그려진 지옥도와는 상관없이 핵폭탄의 위력에 탄복하며 일본도 핵무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54년 3월 나카소네는 일본의회에서 원자력 개발 예산을 통과시킨 주역이 되었다. 나카소네의 파트너는 <요미우리신문>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였다. <요미우리신문>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대강연회를 여는 등 적극적으로 원자력을 홍보했다. 두 사람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선명한 기억 때문에 일본인들이 당연히 갖고 있는 핵에 대한 거부감을 피해 가기 위해 핵폭탄과 핵발전, 즉 핵의 군사적 이용과 핵의 평화적 이용을 분리했다. 비유해서 말하자면 아톰과 고질라. 착한 핵과 나쁜 핵을 분리한 것이다. 이 두 사람이야말로 일본 핵의 아버지라 할 만한데, 우리 입장에서 보면 소름끼치는 과거사를 갖고 있는 작자들이다. 나카소네는 해군 장교 시절 전쟁 스트레스로 서로 싸우는 부하들을 ‘배려’하여 군위안소를 설치한 자다. 쇼리키 마쓰타로는 단순히 이승엽이 활약했던 요미우리의 구단주나 일본프로야구의 아버지나 일본 티브이 방송의 아버지가 아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경찰의 고위 간부였던 쇼리키는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이라는 비극을 가져온 유언비어-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 폭동을 일으킨다-를 퍼뜨린 장본인이었을 뿐 아니라 패전 후 A급 전범으로 수감된 바 있다. 일본에서 핵 마피아의 핵심으로 꼽히는 자들의 전력이 일본군 위안소 설치, 조선인 학살의 진원지, A급 전범이라는 사실이 꼭 우연일까? 이런 현실을 “고놈이 고놈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1972년 9월8일 오원철 당시 청와대 경제2수석이 작성한 핵무기 개발 관련 문서. 조선일보 제공
박정희는 원전의 아버지였다
1970년 고리 1호기 착공에 이어
핵무기 제조기술 확보와
핵 재처리 시설 도입을 추진했다
그리고 1979년 그의 죽음 뒤
미국에서, 소련에서, 일본에서
원전 사고는 현실이 되었다

정부출범 앞둔 박근혜는 어떨까
작년 총선 새누리당 비례 1번은
원자력공학자가 차지했고
대통령인수위엔 핵발전론자가 있다


한국은 1956년 2월3일 미국과 ‘한-미 원자력협정’을 체결했다. 단 한명의 원자력공학자도, 핵이라는 극히 위험한 물질을 다루기 위한 그 어떤 법적·제도적 장치도 없던 때였다. 한국원자력연구소가 펴낸 공식 역사는 “우리 원자력 사업은 우리 자신의 요청에서가 아니라 미국의 권유로 시작”하였다고 쓰고 있다. 뒤에 에디슨사의 사장을 역임한 워커 리 시슬러는 이승만에게 우라늄 분말과 석탄 덩어리를 보여주며 “이 우라늄 1g으로 석탄 3t의 에너지를 낼 수 있다. 한국은 자원 빈국이 아니냐. 석탄은 땅에서 캐는 에너지이지만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내는 에너지다”라고 설득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문교부 과학교육국에 원자력과를 만든 데 이어 ‘원자력법’을 제정(1958년 3월)하고 1959년 1월에는 원자력 정책을 집행할 기구인 ‘원자력원’을 만들었다. 이승만은 원자력원 원장을 부총리급으로 두려 했을 만큼 원자력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꼭 이승만뿐이 아니었다. 조봉암도 진보당 강령을 통해 “원자력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산업혁명은 항구적인 인류 평화를 보장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했다. 서울대에 원자력공학과가 설치된 것은 1959년이었다. 세계 최초였다. 미국에서도 원자력공학과는 대학원 과정에만 있었지 학부에 설치된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핵발전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반민특위가 설치된 후 제1호로 검거된 친일 자본가 박흥식이었다. 영국 방문 중 원자력발전소의 미래에 눈을 뜬 박흥식은 우선 1957년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대리점 계약부터 맺었다. 그는 1958년 1월 정부에 원자력발전소 건립계획안을 제출했으나, 국민소득 70달러인 나라를 이끌고 있던 이승만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에너지로서의 원자력보다는 핵무기로서의 원자력에 더 주목했다.


핵발전은 싸고 안전하다는 거짓말

박정희는 핵무기와 핵발전소 모두에 관심을 보였다. 박흥식은 1968년 초 박정희에게 불려갔는데 박정희가 원자력발전소 구상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어 진땀을 흘렸다고 한다.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던 박정희 정부는 1967년 10월 장기 전원개발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에는 1976년까지 50만㎾급 원전 2기를 건설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정부는 핵발전소 부지 선정을 위한 조사 작업에 착수했다. 대량의 냉각수를 확보해야 하는 핵발전소의 특성상 그 입지는 해안가이기 마련이다. 바닷가에서 지도를 펴들고 여기저기 사진을 찍어대던 부지 선정 요원들은 간첩으로 몰려 끌려가기 일쑤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부지로 선정된 곳은 경남 동래군 장안면 고리였다. 그때만 해도 원자력발전의 안전성이라는 신화가 먹혀들어갈 때였기에 반경 30㎞ 이내에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이 있다는 사실은 고려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고리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온 땅에 핵발전소가 들어선다는 것에 반대했지만, 군사독재 시절 그 목소리는 널리 퍼지지 못했다. 한전은 주민들이 감정가의 10배에 달하는 보상금을 요구하며 ‘터무니없는 생떼’를 쓰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리 원자력발전소(1호기)는 1970년 9월 착공되어 1978년 4월에 상업가동을 시작했다. 고리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이나 포항제철 건설보다 규모가 큰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공사였다.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정부는 핵발전소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유신시대에 청와대 경제2수석으로 방위산업을 총괄했던 오원철에 따르면 박정희는 1972년 초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기술력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정부는 캐나다와 교섭하여 고리 원자력발전소 1, 2호기의 경수로 모델과 다른 캔두형 중수로(원전을 세우지 않고도 연료봉 교환이 가능)를 도입하려 했다. 이것이 이제 설계수명이 다한 월성 1호기이다. 정부는 또 프랑스와 교섭하여 핵연료 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고자 했다. 한국보다 앞서 중수로를 도입한 인도가 1974년 사용 후 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실험에 성공하자 미국은 박정희가 핵무기 개발을 위해 중수로를 도입하려는 것으로 의심했다. 특히 가동중인 원자력발전소가 단 한 기도 없는 상황에서 재처리 시설을 서둘러 도입하려 한 것은 그 의심을 확신 수준으로 굳게 만들었다. 한국의 원자력 학계와 업계는 19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으로 직격탄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신군부 세력은 미국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미국이 불편해했던 핵 관련 기술을 일체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때 한국원자력연구소는 한국에너지연구소로 이름을 바꿔야 했는데 원자력 학계에서는 이를 ‘치욕의 창씨개명’이라 부른다.

1980년대 핵발전소 건설이 주춤했던 것이 핵을 숭배했던 박정희가 죽고 미국이 한국의 핵 관련 기술개발을 억눌렀기 때문은 아니다. 198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핵발전소 건설이 중단되었다. 1979년 3월2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섬에 있는 가동한 지 석달밖에 안 된 원자력발전소에서 노심용융(멜트다운)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급수 시스템의 고장에 운전원의 실수와 미숙한 대처가 겹치면서 다섯겹의 방호벽 중 네번째 벽까지 뚫리는 아슬아슬한 사고가 발생했고, 공황 상태에 빠진 주민 10만명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다행히 대기 중에 유출된 방사성 기체의 양은 주민 건강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싸고 깨끗하고 안전한 꿈의 에너지라는 원자력의 신화를 산산이 깨버리기에는 충분한 양이었다. 현장을 방문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미국은 새로운 핵발전소를 짓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원전 5위 한국, 21기 가동중·9기 추진중

첫번째 핵발전소 사고는 가장 많은 핵발전소를 보유한 미국에서 일어났고, 두번째 사고는 두번째로 핵발전소를 많이 보유한 소련에서 발생했다. 1986년 4월26일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핵발전소에서 대형 폭발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수만명, 어쩌면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은 이 초대형 사고의 여파로 소련도 결국 무너진 것이다. 스리마일 사고가 경고음에 불과한 것이었다면 체르노빌 참사는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그 앞에서 누구도 감히 핵발전소를 짓자고 입을 벙긋하기 힘들었다. 전세계의 핵 마피아들에게는 오랜 굶주림의 계절이 시작된 것이다. 이명박을 비롯하여 전세계 핵 마피아들이 입에 달고 사는 ‘원전 르네상스’란 한 20년쯤 세월이 흘러 체르노빌의 기억이 희미해졌기 때문에 나올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이 국내에서 오랫동안 신규 핵발전소 건설을 포기하면서 미국 최대의 핵발전소 건설업체이자 한국에도 8기의 핵발전소를 지은 웨스팅하우스는 일본 도시바에 넘어갔다. 55기의 핵발전소가 가동중인 일본은 그동안 세계 3위의 핵발전소 대국이 되었고, 한국은 21기로 5위가 되었다. 중국은 현재 13기의 핵발전소가 가동중이지만, 건설중인 핵발전소는 무려 77기나 된다. 동북아시아는 가동중인 핵발전소만 89기, 건설중인 핵발전소는 102기에 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건이 터진 것이다. 세번째 핵발전소 사고는 세번째로 핵발전소가 많은 일본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본다면 다음 순서는 프랑스 아니면 한국이 된다.

스리마일 사고 이전 미국 핵규제위원회의 라스무센보고서는 핵발전소 사고로 개인이 사망할 확률은 200억분의 1로 자동차 사고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할 확률보다 훨씬 낮고 뉴욕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야구 보다가 운석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고 방정을 떨었다. 체르노빌을 겪고 후쿠시마를 겪고도 핵 마피아들은 여전히 핵발전소는 안전하다고 떠들어댄다. 핵발전소 사고가 날 확률은 수백만분의 1이라 주장하지만 지금까지 건설된 450여기의 핵발전소 중 스리마일 1기, 체르노빌 1기, 후쿠시마 4기 등 모두 6개의 핵발전소에서 중대한 사고가 발생했으니 지난 30여년간 사고 발생 확률은 75기당 1기꼴로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21기의 핵발전소가 가동중이고 11기가 건설될 예정이다. 후쿠시마 사고는 핵발전소가 밀집해 있는 지역에서의 사고는 동시다발로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데 한국은 21기의 발전소가 고리, 월성, 울진, 영광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박정희가 핵발전소를 건설할 때는 그 위험성이 가능성으로만 있었지 현실로 드러나지는 않았다. 핵발전이 싸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어마어마한 폐기물 처리 비용만 포함해도 핵발전은 가장 비싸진다. 만약에 사고라도 터져 사람과 자연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면 그 비용은 계산조차 불가능하다. 핵폐기물 처리장 문제를 둘러싼 안면도 투쟁, 굴업도 투쟁, 부안 투쟁이나 대규모 송전탑 문제에서 보듯 핵발전은 엄청난 사회적 갈등을 수반한다. 전기는 서울이나 대도시, 공단에서 쓰고 발전, 송전, 폐기물 처리는 원자력의 혜택을 가장 적게 보는 오지 사람들이 떠맡아야 한다. 핵폐기물, 특히 고준위 핵폐기물의 처리에는 수만년이 걸린다니 크로마뇽인 시대에 묻어둔 폐연료봉이 지금도 방사능을 뿜어내고 있다는 얘기다.

박정희 시대에 가동을 시작했거나 첫 삽을 뜬 고리 1호기와 월성 1호기의 설계 수명은 이미 끝이 났다. 이들 원자로는 미국의 스리마일 사고 이후 핵발전소의 안전성에 관한 기준이 세계적으로 강화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2012년 5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안전점검이 극도의 불신을 받는 이유는 핵발전소의 핵심인 압력용기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증 골다공증 환자를 마라톤 경기에 내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거기다 부품 납품비리에 사고 은폐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탈핵은 피할 수 없는 지상과제이다. 지금 당장 가동중인 모든 핵발전소를 멈춰 세우라는 얘기가 아니다. 10년, 20년을 내다보며 탈핵의 로드맵을 지금 만들기 시작해야 한다. 수력이나 화력발전과 달리 핵발전은 가동을 멈출 수 없어 에너지의 과잉 소비를 부추겨 왔다. 박정희는 늘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전기 아껴 쓰고 태양열과 풍력 등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겨레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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