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국무회의에서 “선거철이라 상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긴 하지만,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고 민생 문제와 중요한 국정과제가 추호도 흔들림 없이 지속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4·11 총선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박정하 청와대 대변인은 ‘간접적 발언은 있었느냐’는 질문에 “유추해서 해석하면 될 것”이라고 답했다.
이 대통령의 발언을 유추하면 작금의 사태에 대한 인식을 짐작할 수 있다. ‘선거철이라 혼란스럽다’는 언급은 불법 사찰 논란을 야당의 총선용 정치공세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해명이나 사과는 거부하겠다는 의미다. ‘공직자들이 중심을 잡고 일해달라’는 주문은 여야 모두에서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권재진 법무장관을 경질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어제 국무회의에는 권 장관도 참석했다.
정부가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찰하고 그 증거를 은폐조작한 것은 희대의 국기문란 범죄이다. 전 대통령실장과 전 민정수석, 현 공직기강비서관 등 청와대 핵심 참모들이 줄줄이 의혹에 연루되고, 전 고용노사비서관이 공직윤리지원관실 업무자료를 이 대통령에게 ‘직보’했다는 증언까지 나온 터다. 야당은 물론 여당 일부에서도 이 대통령의 진상 고백과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이 모두를 ‘선거용’으로 치부할 생각인가.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하는 안이한 인식에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대통령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사태를 직시하기보다 남의 일인 양 이야기하는,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을 자주 구사해왔다. 내곡동 사저 부지를 둘러싼 의혹이 커져가던 지난해 10월 미국을 방문 중이던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는 시끄러운 나라다. 국내 신문을 보면 시커먼 것(기사 제목)으로 매일 나온다”고 말했다. 사저 문제를 둘러싸고 들끓는 비판 여론을 ‘시끄러운 일’로 간단히 넘기려 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이번에도 기존 방식을 고수하려는 듯하다. 일단 총선이라는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생각일지 모른다. 과연 뜻대로 될까. 총선이 끝난다 해도 검찰 수사가 종결되는 것은 아니다. 검찰 수사가 종결된다 해도 국회 국정조사 등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민간인 불법 사찰 문제는 대선 때까지 계속 뜨거운 이슈가 되어 시민들의 분노를 키울 것이다. 이 대통령이 침묵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경향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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