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씨는 한나라당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를 지원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지금이 정치의 위기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박근혜씨가 위기를 느끼는 것은 그를 위해 나쁠 건 없다. 위기감이 있어야 할 일이 보일 터이니.
그러나 지금은 정치의 위기라기보다는 한나라당의 위기, 우파의 위기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박근혜씨는 혹시 안철수-박원순 바람이 민주당을 물 먹인 것을 두고 ‘정치와 정당의 위기’라고 불렀는지 모른다. 반(反)정치, 반(反)기득권, 반기성(反旣成), 반(反)엘리트주의 같은 것이 저변에 깔려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안철수-박원순 돌풍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을 떠나 민주당으로 가진 않았지만 분명 범야(汎野) 단일화로 갔다.
범야란 어떤 세력인가? 박원순 후보는 민주당 입당을 사절하고 무소속으로 뛰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원은 아니지만, 그리고 법률상으로는 무소속일지라도 정치적으로는 무소속이랄 수 없다. ‘시민후보’라 하는 것도 합당하지 않다. 그는 엄연한 좌파 빅 텐트(big tent)의 후보다. 그는 민주당에 들어가는 대신 민주당을 한 계파 수준으로 격하시킨, 보다 심화된 좌파 후보가 됐다. 따라서 박근혜씨가 안철수-박원순 현상을 위기로 보았다면 그것은 정치의 위기가 아니라 한나라당과 우파에 불어 닥친 위기라 해야 할 것이다.
왜 한나라당의 위기, 우파의 위기인가? 우선 구조적인 요인이 있다. 뉴욕을 들썩하게 만든 “월가를 점거하라” 시위는 “생활고에 쪼들려 살기 힘들다” “탐욕을 처단하라”고 외쳤다. 이런 성향은 한국의 구직난, 전·월세난, 물가고, 가계파산에도 상당부분 파급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젊은 불만층이 그 탓을 집권세력인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 그리고 보수적인 것으로 돌릴 개연성이 꽤 높다.
또 하나의 요인은 지난 4년 내내 이명박 정권, 한나라당, 박근혜씨가 이렇다 할 감흥의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원전수주, 4대강, 자원외교나 하겠다는 투로 대통령직을 정치적 맹물로 만들어버렸다. 한나라당은 가치집단, 동지적 결사체이길 방기했다. 열정도, 비장감도, 전투력도, 역사의식도, 정체성도 분명치 않았다. 박근혜씨 또한 늘 옆에 비켜 서 있으면서 “나한테 말 시키지 말라”는 식이었다. 이러니 이들을 뽑아준 사람들까지도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알겠느냐?”고 할밖에 더 있었겠는가?
한 가지 요인을 더 꼽는다면, 정쟁(政爭)의 아젠다 설정, 정치의 연극적 효과라는 점에서 한나라당은 늘 뒤쫓아 가는 식이었다.
반면에 새 드라마의 제작, 연출, 스타 발굴, 문화 코드, 무대장치, 선동수사학에서 범좌파는 항상 빨랐다.
DJ가 재야 운동권을 흡수해 평화민주당을 허물고 새천년민주당을 만들었듯이 범좌파는 민주당을 넘어 ‘진보대연합+안철수’라는 신상품을 출시했다. 시청자의 눈길은 항상 새로운 드라마에 쏠리게 마련이다. 주연배우 박원순은 왜 권력교체를 해야 하는지의 아젠다를 한 마디로 던졌다. “그들만의 리그는 안된다”고. 불만의 뇌관을 조준한 수사학이었다.
이에 비해 한나라당 식(式)이 어땠는지는 당사자들 스스로 한 번 돌아볼 일이다. 한나라당은 우파 빅 텐트를 치기 위해 자신들을 한 발 뒤로 밀어놓을 용의가 우선 있을지? 주연배우로 나경원을 낙점하기까지도 몇날 며칠 김을 뺐다. 이번 대결의 정치적 함의는 이거다하는 단칼 아젠다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겠다는 나열식이다. “또 다시 그들만의 10년으로 되돌아가잔 말이냐?”고 반격할 법도 한데 그런 게 없다.
정치투쟁에서 이길 생각이 있는 정파라면 마땅히 싸움의 프로라야만 한다. 그리고 프로라면 당연히 이 시대 싸움의 역사적 의미부터 알고 시작해야 한다. 범좌파는 그걸 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알까? ‘실용’하느라 그걸 외면한 한나라당 아니었나? 이게 안철수, 박원순보다 더 큰 한나라당의 진짜 위기일 것이다.<경향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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