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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세상을 멈추는 날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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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04:30:11, Hit : 43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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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는 우리에게서 자리를 빼앗은 자들을 심판하는 선거이며, 자리를 요구하는 선거이다.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자리가 필요하다. ‘일할 자리’와 ‘설 자리’, 그리고 ‘살 자리’가 필요하다. ‘일자리’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살 자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더불어 살며 어떤 터전의 주민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 ‘설 자리’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에 몫을 가지고 기여하기 위해 필요하다. 일자리를 가졌을 때 우리는 노동자가 되고, 살 자리를 가졌을 때 주민이 되며, 설 자리를 가졌을 때 시민이 될 수 있다. 그러나 IMF 이후 15년의 시간, 특히 지난 5년은 우리들의 일자리와 설 자리, 그리고 살 자리가 체계적으로 파괴되어 온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이라는 일자리의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비정규직을 고용불안이나 경제적 문제로 다뤄왔다. 그러나 비정규직의 문제를 사람사이의 관계 문제로 돌려보면 비정규직이 새로운 형태의 신분제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정규직은 고용의 불안정성 때문에 고용주와, 혹은 정규직들과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강요받는다. 비정규직은 단지 고용계약상에서만 차별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용계약 이외의 차별과 구속을 더 많이 받고 있다. 
간단하게 학교의 예를 들어보자. 비정규직인 기간제 교사의 생과 사는 전적으로 그를 고용한 교장에게 달려 있다. 한 학교에서 교장이 고향에서 수확해 온 고구마를 판 적이 있었다. 눈치를 보면서도 다른 교사들은 무시할 수 있지만 비정규직 교사는 거부할 수 없다. 교장의 눈 밖에 나면 다음 계약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교사직이 아닌 경우는 더 비참하다. 교사인 한 친구가 알려준 일이다. 학교장경영능력평가가 있는 날이었다. 평가단을 위해 간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교무실은 행정실에 부탁하고 행정실은 다시 교무실에 있는 교무행정보조사에게 그 일을 시켰다고 한다.
이 일을 보며 교사인 친구가 떠올린 것이 조선시대 선비와 하인이었다. 가을밤에 촛불에 비친 국화 빛이 고아했다. 흥이 난 선비가 친구를 불러 그 빛을 음미하며 술을 마시는데 심부름 하는 아이에게 초를 들고 이리저리 국화를 비치게 하였다고 한다. 보라. 이 하인 아이와 비정규직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누군가는 즐기고, 누군가는 수발을 든다. 누군가의 수발을 드는 존재, 이건 노동자가 아니라 하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나는 비정규직은 노동과 경제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분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닌 하인, 새로운 신분제의 등장, 이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초를 흔들고 하인들에게서 ‘설자리’를 앗아간다. 노동자는 비록 일할 때는 고용주에게 구속되지만 그것은 계약에 따라, 그 시간과 공간에서만 그렇다. 나머지 시간에 고용주와 노동자는 시민으로서 평등하다. 그러나 하인은 주인과 평등할 수 없다. 하인에게 정치에 참여할 것을 보장하는 주인은 없다. 주인이 바라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주인들의 정치, 즉 ‘귀족정’이다.
이번 선거는 귀족정치에 맞선 ‘하인’들의 반란이어야 한다. 결국 투표를 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이 있다. 주야간 교대하는 노동자들과 택배기사, 간병인들이다. 이번 선거는 이들에게 투표라는 ‘최소한의 참여’조차 보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평등한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하게 집요하게 훼방 놓았다. 이처럼 정치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우리를 그들의 수발이나 드는 하인으로 삼으려는 자들에게 철퇴를 가해야 한다. 그들이 방해할수록 우리들은 기를 쓰고 투표장에 가자. 그 자체가 그들에겐 위협이다. 투표에 참여할 수 없는 동료들을 위해, 잠시 세상을 멈추자. 그리고 투표하자.<경향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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