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평화재향군인회(가칭), 평화군인사랑회::

 
 
 
 
 
 
 

HOME > 게시판 > 논평/성명서



 나이가 들수록 아내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오마이,표대표, 펌)

2007-02-06 11:30:28, Hit : 3065

작성자 : 김환영

나이가 들수록 아내의 고마움을 느낍니다
 
    표명열(pyo3393) 기자    
 
 
남자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여자에 비해 여러 가지 특별대우를 받으면서 특권을 누리며 살아온 것이 분명하다. 하긴 요새 젊은이들 가운데는 부인에게 매일 매 맞는 남편도 있다하니 다를지 모르지만, 우리 또래의 남자들은 대개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 문화가 쉽게 씻겨 없어지기 어렵기 때문에 지금도 알게 모르게 우리 남성들은 선조님들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지 않은가! 별 비용을 들이지 않고, 아니 거의 무료로 아주 이상적인 가정부 한 사람을 고용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이 우리는 편리하게 살아왔다. 말로는 '평등한 인격체' 운운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았다.


별 일도 아닌 것 가지고 남자라는 이유 때문에 큰 소리로 화내고 쏘아붙여도 일단 아내 쪽에서 먼저 잠잠히 수그러들거나 참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가정생활의 주 관심은 남편의 생각과 입장, 선택에 전적으로 맡겨지다시피 했다.


나는 만 49세에 정년퇴직했다. 이것저것 여러 가지 많은 종류의 직업을 경험해 봤지만 군대를 반드시 개혁해야 된다는 생각만은 늘 간직하고 살았다. 기업체를 다니며 강의를 하는 것이 가장 보람 있었고 나의 적성에 맞았다. 그러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재미있어 하고 소질이 있다 하더라도 하루 아침에 잘 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저기 기업체 연수원 등을 쫓아다니며 처음 강의를 시작했던 당시의 매일 매일 생활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아주 감동적으로 멋들어지게 잘 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 늘 나를 무겁게 짓눌러 항상 소화불량에 걸려 있었다.


내 방 한쪽 벽에 간이 칠판을 걸어두고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부터 시작하여 줄줄 말이 터져 나올 때까지 반복 또 반복했다. 칠판 위의 글씨크기 색깔까지 틀리지 않게 끊임없이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내가 기업체에 다니며 맨 처음 강의했던 내용은 '의사결정과 문제해결'에 관한 세계적 프로그램인 'KT'교육이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강사였으니 강의 해달라고 부르는 회사도 별로 많지 않았다. 어쩌다 부탁이 들어오면 온 집안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세상을 몽땅 건질만한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혼자 맡은 것처럼 긴장하고 열을 내어 준비하고 연습했다. 요란스럽고 어지럽게 난리 난 것처럼 부산을 떨다가 시간이 되어 허겁지겁 강의가 있는 장소로 떠나고 나면 뒤처리와 정리는 언제나 아내의 몫이었다.


한 번은 제주도에서 전기 기술자격 소지자들에 대한 교양강의가 있어 늦을세라 연속 손목 시계를 보며 비행기 출발 2시간 전에 김포공항에 도착,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내가 나타났다.


깜짝 놀라 웬일이냐?고 했더니 내가 떠난 후 뒷 정리를 하다보니 강의 시 놓고 보아야할 요약 자료를 챙기지 않고 갔음을 발견하고 황급히 달려왔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했다. 그 요약 메모 내용을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단 교탁 위에 올려놓아야 자신감이 생기는데 큰 일 날 뻔했다.


그러나 그 자료를 가지고 오느라 몸도 아픈 아내가 얼마나 가슴 졸이며 고생했을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내가 그렇게 뒷바라지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만 여겨 허겁지겁 찾아온 아내에게 뭐 그리 큰일이나 난 것처럼 그걸 가지고 왔느냐는 식으로 덤덤하게 대했었다.


남자다운(?)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에서였을까? 그날 만약 참고 자료가 없어서 강의를 실패했었다면 보나마나 나는 다짜고짜 "여자가 그런 것도 챙겨 주지 않고 도대체 무엇 하는 거요?"라고 큰소리로 화내며 면박을 주었을 것이다. 감사해야할 사람, 감사해야 할 일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 왔었다. 해가 갈수록 미안함이 쌓인다.


그 후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우리들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여 백발이 흑발보다 더 많아진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갔다. 내 강의 내용도 의식혁신을 위한 정신교육 특강으로 바꾸었다. 여기 저기 소문이 퍼져 강의시간도 많아졌다.


그전처럼 강의 진행자나 피교육자로부터 어떻게 하면 잘 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그런 걱정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깊은 감동을 주어 교육 효과를 높일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게 되었다. 하다보니 IMF의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라는 데가 많아 내 강의 시간은 크게 줄지 않았다.


포항종합제철에서의 강의가 있는 날 이었다. 태풍 '엘리뇨'의 영향으로 항공기가 결항 될 것 같아 하루 전에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울 역에 도착하여 개찰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방긋 웃으면서 갑자기 앞에 나타났다. 너무나 뜻밖이라 깜짝 놀랐다.


내가 허둥지둥 나가면서 가방 속에 넥타이를 넣지 않고 출발했다는 것이다. 강사의 첫인상은 매우 중요하다. 지식을 전달하는 인지(認知)적인 교육이 아닌 정의(情誼)적인 강의는 더욱 그러하다. 마음을 움직여 감동을 불러 일으켜야 하기 때문이다. 넥타이 선택까지도 크게 신경 써야 한다.


나는 가능하면 콤비 복장을 한다. 좀 더 젊고 발랄해 보이고 싶어서이다. 그 해 여름 아내와 함께 길 가다가 5천원 주고 산 넥타이가 마음에 꼭 들어 늘 메고 다녔다. 노란색 바탕에 아주 작은 붉은 꽃무늬가 박혀있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너무 멋있다고 한 마디씩 해 주었다. 하늘색 와이셔츠에 그 넥타이를 메고 강단에 서면 나는 왠지 자신감이 넘치고 절로 신바람이 났다.


그토록 좋아하는 노란색 그 넥타이를 가지고 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당황할 것인가? 다른 분의 넥타이를 빌려 메고 어색해할 모습을 생각하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아내는 덕소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지하철을 두 번이나 바꿔 타고 헐레벌떡 서울 역까지 달려 왔다고 한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이 도대체 무엇이 길래, 그리고 그 강의 2시간이 뭘 그리 대단 하길래, 비도 주룩 주룩 내리고 있는데 성치도 않은 몸을 이끌고 먼 길을 저렇게 황겁히 달려오다니…. 생각할수록 너무나 고맙고 안쓰러웠다. "여보 너무 고맙소!" 떨리는 목소리로 아내의 두 손을 꼭 쥐었다. 아내는 뭐가 고마울 일이냐고 하며 빙그레 웃기만 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나는 남성이라는 한 가지 덕분으로 다분히 폭군적으로 살아왔다. 아무 말이나 서슴없이 퍼부을 수 있었고 모든 선택에는 늘 특별 우대였다. 모든 잘못된 일은 아내의 불찰인 것처럼 몰아세울 때가 많았다.


며칠 전 집 앞 한강 길을 걸으며 "당신은 무서운 독재자였어요! 마음씨 좋은 독재자였지!" 하며 "그렇게 팔팔하던 그 기가 이제 다 꺾여가네요!" 해서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성질 급한 나를 지금도 움직이고 있는 건 역시 아내다.


아내는 몸이 몹시 허약하다. 앓고 누워 있을 때는 참으로 안됐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시어머니를 잘 모시니 잘못 모시니 말들도 많았지만 날마다 반찬 걱정에 국을 끓이는 일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어서 늘 감사했다.


어느 날 친척 결혼식에서 식사시, 어머니가 좋아하실 떡이 보이자 서브하는 아줌마의 허락을 받아 몇 개를 손수건에 싸는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을 적신 적이 있다.


젊은 날 너무나 철없이 대했던 후회가 가슴깊이 파고든다. 이제는 그 시어머님도 하늘나라에 가셨고 우리 차례가 되었으니 더욱 감사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도우며 살다가 우리도 그 나라에 가리라. 
 
 
  2007-02-05 10:28
ⓒ 2007 OhmyNews 
 
 


* 조직국장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3-01 17:10)



“누가 감히? 너희가 사관학교를 알아?” [3]
당신! 변해야 된당께(오마이, 표명열, 펌)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