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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월이 가도 채우지 못한 허전함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8>

2007-10-27 19:22:32, Hit : 7162

작성자 : 표명렬
 3. “군에 갔다 와야 사람 된다”에 대한 반대

젊은이와 군대, 그리고 잃어버리는 것들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대부분 한번은 군대 생활을 경험한다. 군대 생활은 사회 생활의 첫걸음이다. 이 처음 시작이 중요하다. 사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식의 기본 틀이 이 때 형성되기 때문이다. 여태까지 각자 경험해 왔던 학교와 가정 밖의 새로운 세계를 접하면서 “세상이란 이런 것이구나”하는 사회 생활의 기본 인식과 관점이 이 때에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조직 내에서 상․하간 역할에 대한 인식, 동료 등 타인에 대한 느낌, 주어진 과업 수행에 대한 마음자세, 규칙에 대한 태도, 국가 권위에 대한 의식 등이 이 기간 동안에 거의 습관화되고 내면화된다. 특히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열정적인지, 냉소적인지, 도전적인지, 소극적인지, 낙관적인지, 비관적인지 등의 사고 방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


과거 독재 정부 하에서 ‘군에 갔다 와야 사람된다’는 이 말의 뉘앙스는 결코 바람직한 의미만은 아니었다. 군 생활을 통해서 불합리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서 무조건 체념적으로 순응하는 것을 습관화함으로써 비판력을 무디게 하는 소극성을 장점으로 생각하는 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불행히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의식형성에 있어서 군대는 이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측면이 더 많았다. 이는 우리 군이 일본 군대 문화의 망령에 너무 오래 사로잡혀 있어서 권위주의적 문화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온 자랑스런 민족의 군대로서의 자부심을 젊은이들에게 심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랑스런 우리 국군의 정신적 연원이라 할 수 있는 의병 전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빛나는 활약상에 대해서 군에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군인이 가져야 하는 정신 자세를 말할 때 정작 중요한 이런 부분이 배제된 상태에 무엇으로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었겠는가?


이런 정신적 알맹이는 다 버리고 적을 죽인다는 군대의 기능적 특성과 군기(軍紀)만을 끊임없이 강조해왔다. 휴식 군기, 식사 군기, 취침 군기, 오락 군기, 면회 군기, 보행 군기, 대화 군기, 취침 군기, 내무생활 군기 등 병사들을 옴짝달싹할 수 없도록 얽어 멜 궁리들만 하고 있었으니, 그 안에서 민주적인 시민의 양성은 기대하기 힘든 일이다.


무조건적인 절대 복종과 엄격 일변도의 군기만이 군대의 본령이라는 수준의 상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에게 군림해 왔고 후배들은 “군대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권위에 기를 펴지 못했다. 또한 그 권위를 맹종함으로써 얻는 영달에 타협하여, 문제의식 자체가 마비되어 있었다 할 수 있다. 군사 쿠데타로 성립된 정통성이 미약한 독재 정부가 30년 간 이어오는 동안 민주 군대로의 개혁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변화와 개혁을 향해 도전하는 자는 조직 내에서 부정적인 사람으로 낙인 찍혀 경쟁에서 탈락되기 십상이었다.


문민정부가 되어서도 이런 군대 문화의 개혁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국민의 정부에서도 손을 대지 못했다. 권위주의에 찌든 의식과 문화를 청산하고 민주 시민으로서의 새로운 가치를 각자의 삶 속에서 실현하기 위한 의식 개혁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담보로 하고 있는 군대야말로 이러한 의식 혁신을 가장 철저하게 앞장서 단행하고 그 가치를 군대 운영의 원리로 뿌리 내려야 할 일차적 대상이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변하고 있다. 구성원들의 정신 자세와 행동 양식이 조직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다. 무한한 상상력과 도전 의식에 기초한 창의력과 아이디어의 발현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역량이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되는 시대다. 의무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되돌아가는 장병들의 마음 속에 군대가 좋게 기억되는가 아닌가의 여부가 국방력을 결정하는 힘이 되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우리의 의무 복무 장병들은 결코 안일함만을 탐하는 형편없는 존재들이 아니다. 나는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회와 격리되어 피나는 훈련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며 필요로 할 때는 목숨까지 바쳐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자긍심(Self-Esteem)이 없는 집단은 죽은 조직이다. 우리 국군 장병들은 어디에서 자부심을 찾을 것인가? 그리고 군의 존재 이유, 정체성을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군대는 보수집단이다


개혁성을 지향한다는 어떤 정당의 군인 출신들의 모임에서 “우리 군 출신들은 당내에서 보수의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논의를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진정한 의미의 보수와 냉전적 사고를 고수한다는 수구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과연 그 분들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했는지 궁금했다.


우리 사회에는 “군대〓보수집단”이라는 등식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군의 본질적 특성상 이는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군을 보수집단이라고 정의하는 의미는 첫째 군은 현존하는 정권에 절대 순응한다는 뜻이다. 진보적 성격의 정당이 집권을 하건 보수적인 정당이 정권을 잡건 상관없이 내내 그 정부 하에서 군대는 동일하게 존재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군은 보수와 진보라는 정치적 성향과는 무관하다. 장병들 중에는 보수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도 있고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도 있다. 우리 헌법에는 엄연히 군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둘째 우리 국군은 민족의 군대라는 점에서 강력한 보수성을 띤다. 미국 군대는 성조기를 상징으로 국가 의식을 고취하지만, 우리 국군은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적 자부심을 함양함으로써 존재 이유와 자긍심을 배양한다. 특히 세계화 시대에는 이런 면에서의 보수성이 더욱 두르러지게 된다. 다른 어떤 조직보다 ‘국가’와 ‘민족’을 강조해야만 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우리 국군은 민족 의식이라는 측면에서의 보수성은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왔던 “군은 보수적이야”라는 말은 이런 군 고유의 특성을 중심으로 한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다만, 군의 정치적 진보성을 배제한다는 수구적 의미로 사용되어 왔을 뿐이다. 이것은 우리 국군의 성장 과정에서 민족을 멸시하는 식민사관에 찌들어 있던 친일 세력들이 우리 군을 이끌어 뿌리내려진 문화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비극은 우리 군을 지배해온 친일 세력들과 군사 독재 세력들이 파놓은 함정이다. 군은 극우 보수라는 울타리를 쳐놓고 자기 생존과 세력 확대의 발판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군을 볼모로 한 일종의 물귀신 작전이었다.


사실 지난 역사에서 우리 군은 정치적 극우 보수 세력들의 은신처요 도피처 역할을 해왔다.  8.15 조국광복 후에는 반민특위의 활동을 피해 들어온 친일 세력들의 은신처로 이용되어 왔었고  5.16 쿠데타 이후에는 반민주적 독재 권력의 근거지 역할을 해 왔다. 이들 친일 세력과 군부 독재 세력들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정치적 수구 세력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남․북 간의 증오와 불신의 냉전적 대결 구도가 화해와 협력의 평화 구조로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들 수구 세력에 의해서 세뇌되어 왔던 정권 안보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군대는 본래 극우에 가까운 정치적 보수세력이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장기 복무 간부 출신들은 대부분이 그런 입장임을 보면서 한번 잘못 길들여진 교육의 영향이 얼마나 오래도록 지속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군을 위한 변명


군은 이제 이런 물귀신들의 홀림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군을 다시 탄생시킨다는 각오로 그 정신사를 새롭게 기록하여야 한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는 제주 4.3 사건 등과 같이 마치 국군이 저질렀던 것처럼 누명을 쓰고 있는 참담한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 과정에서 저질러진 인명 무시의 잔인성 등 반인륜적인 과잉 학살 부분은 거의 논의하지 않고 당시 권력의 시각에서 정리해 놓은 단순한 정권 안보를 위한 내용들만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지른 자들이 만든 자료들을 앵무새처럼 지금까지도 되풀이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군을 공포의 대상으로 동원하여 감행했던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소행들이 분명함에도 ‘멸공’이라는 이름 아래 가려지고 포장되어 책임자들의 역사적 옳고 그름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지지 않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니 그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우리 국군이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 현장에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던 장병들에게는 사실상 책임이 없다. 지탄받을 일도 아니다. 몇 몇 잘못된 사람들에 의해서 군의 이미지와 자부심에 큰 타격을 안겨준 사건이었음을 당당하게 밝힘으로써 국민적 오해를 씻어내야 한다.


만일 일찍이 육군 사관학교 생도 훈육과정에서 이런 역사적 사실들을 구체적 실례로 들어 진지하게 토의함으로써 무엇이 역사 앞에 부끄러운 일인지 그리고 무엇이 옳고 자랑스러운 것인지에 대한 평가가 진행되었다면, 훗날 5.18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와 같은 그토록 엄청난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심판이 두렵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과 국군 스스로가 국군에 대한 진정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때 우리의 안보는 튼튼해진다. 국군의 자부심은 자랑스런 국군의 역사와 전통에서 발현되고 배양된다. 역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바로 그때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수구가 아닌, 건강한 보수집단으로서 군대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말뿐인 ‘국민의 군대’


1981년부터 4년여 동안 나는 제2군사령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2군 예하의 부대들은 항상 국민들과 직접 접촉하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작전은 지역 주민들과의 긴밀한 협조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지역 주민들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는 군대가 되는 것이 다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각별히 민․관․군의 협조를 강조하고 방위협의회 등 여러 방법으로 친선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협조의 수준은 군의 윗사람들과 지방 관리 및 유지들끼리만 어울려서 친목을 유지하는 활동의 수준에 불과했다.


지금은 지방에 따라 시민단체(NGO)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곳도 있지만, 당시는 소위 지방유지라는 분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재빨리 그들의 비위를 맞춰 편리를 도모해줌으로서 기득권을 챙기기에 급급했던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일제 시대부터 그들을 앞장서 도우며 자신들은 일반 국민들과는 구별되는 특권층으로 생각하는 권위주의적 의식이 깊이 뿌리내린 사람들이다. 주민들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애로를 타개하고 부대에 요구하기보다는 지역 내 군 부대장의 입장을 옹호하면서 주민들을 적당히 다독거리고 무마하는데 익숙한 편이었다.


한번은 동해안의 한 초소에서 민간인을 침투 간첩으로 오인하여 사살한 사건이 있었다. 새벽녘에 해안의 바위 쪽에 사람이 움직이고 있음을 초병이 발견하고 수하를 했으나 응답이 없어서 발사를 했는데 확인해 보니 미역을 따고 있던 동네 아주머니였다고 한다. 규칙과 과정이야 어찌되었든 결과적으로 죄 없는 주민이 사살된 것이다. 사전에 간첩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서 철조망을 치고 엄격히 경고를 하였으니 군으로서는 책임이 없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무리 과정상의 하자가 없었다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볼 때는 한 사람의 양민(良民)이 사살된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 부대도 깊이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철저한 조치를 강구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필요하다면 과연 꼭 그럴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상황이었는지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를 하고 지역 주민들과 논의하여 무엇인가 보완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옳았을 것이다. 군의 존재 이유가 바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데 있다고 늘 힘주어 말해 왔지 않은가.


그러나 그 사건 이후의 조치는 정반대였다. 부사령관은 발포한 초병에게 훈장을 수여해야 한다고 흥분하고 있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의견을 말했다. 간첩 하나를 놓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심한 판단으로 확인하여 주민에게 발포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병사가 처벌받을 일은 아니지만, 상을 받을 만한 일은 더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혹 잠결에 발포를 한 것은 아닌지 혹은 사살 이외에 다른 방법은 전혀 없었는지에 대해서 면밀히 조사해야 한다고 여겼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이다. 그 한 사람과 연관된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이 달린 문제이다.


나는 그 후 당시의 연대장을 만났다. 그는 “이곳 바닷가 사람들은 질이 안 좋아서…”라고 하며 주민들에 대해 좋지 않게 말하였다. 어쩌면 광주민중항쟁 당시 그곳에서 만난 어떤 육사 출신의 말과 이렇게도 똑같을 수 있을까? 인간적인 동정심도 없이 주민들의 기질을 이야기하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자세가 너무나 비슷했다. “당시와 같은 상황에서의 발포는 너무나 당연한 일 아니냐?”라고 말하며 오히려 심각하게 생각하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1965년 내가 전방에서 비무장지대(DMZ)에서 중대장을 하고 있을 때도 비슷한 사고가 있었다. 중대 통신병이 전화선 보수를 위해 민간인 통제선 안에서 작업을 하고 있던 중 언뜻 보니 앞에 보이는 바위틈으로 짐승이 숨는 것 같아서 즉각 총을 쐈다. 확인해 보니 그것은 짐승이 아니었다. 사람의 머리가 명중되어 즉사한 것이다. 신원을 확인한 결과 민간인 통제선 근방에서 고철을 캐어 팔아 근근히 생활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나는 중대원의 실수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기 위하여 보리쌀 한 가마니를 싣고 그 집을 찾아갔다. 방 한 칸을 빌려 어린 아이들과 어렵게 살고 있는 사정이 너무나 딱한 분이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호된 욕설과 원망을 듣게되리라 단단히 각오를 하고 나섰는데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슬픈 기색들이 전혀 없었고 초상집 같지가 않았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부인 혼자만 머리를 풀고 통곡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새파랗게 젊은 중대장인 나를 깍듯이 대하면서 오히려 통사정을 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피해자의 잘못이니 문제를 확대시키지만 말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이었다. 그들은 이 일로 인해서 출입통제가 더 엄격해져 자기들의 생계가 끊기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파리 목숨보다 못한 사람 목숨이었다.


목숨을 걸고 적의 생명을 노려야하는 소총을 가진 전투원들에게 있어 생명 존중, 인간 존중의 신념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특히 군 간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철학과 신념이 ‘인간 존엄’, ‘인간 존중’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우리 군은 이런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해왔다. 군의 민주화 개혁의 당위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민관군’과 ‘군관민’


2군사령부 정훈 참모를 하는 동안 나는 군의 민주화 개혁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을 찾아 하나 하나 해결해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선 2군에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 모범적으로 시행해야할 ‘국민의 군대’를, 구호로만이 아니고 장병들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 실천함으로서 이를 우리 군대 문화 속에 뿌리내리고 군 고급 간부들의 대민 우월 의식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먼저 중국 군대나 대만 군대에서 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의 자세와 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 행동 지침인 애민 신조를 제정하였다. 이를 철저히 교육함으로써 간부들의 대민 정신 자세부터 깨우치고자 했다. 또한 의무 복무 장병들이 전역 후에 현역 장병들을 바라볼 때, 저 사람들이 얼마나 국민을 존중하고 있는지를 자기들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군 일체를 이루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대민 모범 장병을 선발하여 크게 선양하는 운동도 전개하면서 분위기 형성을 위해  열심히 뛰어 다녔다.


그러나 대민 우월 의식이 강하게 잠재되어 있는 군대 문화가 그렇게 간단하게 고쳐질 리 없었다. 장교단 전체의 분위기가 진정으로 국민을 존중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이러한 노력은 형식적으로만 처리되었을 뿐 별 효과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구 일본 군대의 문화가 그대로 뿌리내려진 우리의 군대 문화는 독재 정권의 필요와 아주 잘 맞아 떨어졌다. 일제의 군대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는 독재 정권은 군을 국민을 향한 엄포 세력으로 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군은 수평적인 대민 의식을 형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민들은 병영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바 아니었고 알 수도 없었다. 군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은 군사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외부노출이 차단되었다. 고급 간부들에게는 기관원의 횡포, 병사들에게는 고참병의 횡포가 극심하였다. 군은 인권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고, 의문사가 빈발하는 사각지대가 되었다. 이렇게 되니 군은 국민의 마음으로부터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우리 군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악습은 거의가 이런 일제의 무단 정치적 군사문화를 전수 받음으로써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시대가 흘렀지만, 해악들은 형태만을 달리 하여 여러 가지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우리 군이 국민의 군대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과거 30년 간 독재 정권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런 문화적 구조들을 과감히 개혁하여야 한다.


한번은 관하 사단에서 실시하는 연극제를 돌아보기 위해 한 부대를 방문했었다. 야외 무대 위에 ‘군․관․민 합동 연극제’라고 현수막을 크게 써놓은 것을 보고 사단 참모에게 당장 ‘민․관․군’으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모두 놀래는 눈치였다. 지방 신문사의 기자가 나에게 직접 확인 전화를 걸어왔다.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겠냐는 이야기였다. 아주 조그맣고 유치한 일인 것 같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하나 하나 생각을 바꾸어 가야한다고 여겼다. 그 후「전우신문」에서 그렇게 사용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이 용어는 일반화되었다.


국회 국방분과 위원들이 군사령부를 방문하였다. 어떤 의원이 “2군은 민간인들과 항상 접촉하고 있는 부대인데 국민을 위한 특별한 대책이 있느냐”고 질문했다. 당연히 민사 참모가 대답해야 할 내용이었다. 그러나 평소 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던 군사령관은 정훈 참모가 답하라고 하였다. 나는 신이 나서 애민신조와 대민수칙이 인쇄된 내용을 보이며 소신을 밝혔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강해질 때마다 적의 도발에 대한 철통같은 방위를 내세우며 말 자리나 한다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력시범을 보였다. 다 연발 로켓, 탱크 사격 등을 퍼부으며 국민들에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행위를 하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비판하지 못했다.


일제 시대 이후 군부 독재가 계속되는 동안 이런 짓을 잘하고 맞장구를 치며 앞장섰던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 사회의 수구적 기득권 층을 형성해왔다. 그런 수구 세력들 대다수가 아직도 보수의 탈을 쓰고 글쟁이들을 동원하여 보수의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큰소리를 치고 있다. “북괴는 조금도 변함 없이 남침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는데--”라며 시대 착오적인 냉전적인 발상과 말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의 의견에 맞지 않아 비위에 거슬리는 상대에게는 무차별적인 색깔 칠을 하면서 자신들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철옹성을 쌓아 가고 있다. 물론, 그 철옹성 안에 국민은 없다.




“귀관들 형편없어!”


“귀관들 형편없어!” 기초군사 훈련기간 중 분대장 생도의 앙칼진 목소리를 우리는 수없이 들어왔다. 이 말은 내가 생도가 되기 전에는 별로 듣지 못했던 생소한 단어다. 그러나 상급생들로부터 하도 많이 듣고 또 임관 후에는 내 자신이 병사들에게 내뱉다 보니 완전히 입에 붙어버렸다. 아마 내가 부하들에게 하는 말 중에는 가장 사용 빈도가 많은 용어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후에 보니, 나의 고향 시골에서도 이 말이 보편화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세상이 하도 형편없이 돌아가기 때문에 군에 다녀온 사람들에 의해서 자연스레 전파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누구나 일단 사병 계급장을 달게 되면 형편없어지는 거야! 졸병들은 조금만 느슨해지면 요령만 피우려 든다. 시간의 여유를 주면 안 돼. 틈만 있으면 딴 생각들을 하니까 그저 정신을 못 차리도록 뺑뺑이를 돌려야 돼! 능구렁이 같은 하사관들을 다루는 데는 긴 말이 필요 없어. 그저 몽둥이가 제일이야.” 우리는 늘 이렇게 들어왔다. “병사들이란 형편없는 존재들”이라는 부정적 시각과 선입견을 가지고 우리는 장교 계급장을 달고 부임지(赴任地)로 떠났다.


이런 문화의 군대였으니 물리적 환경도 어려웠지만 그 보다는 정신적 분위기가 더 문제였다. 「군기」라는 이름으로 고참병들의 횡포는 끝이지 않았고, 부하들은 노예처럼 굴종하기만을 강요당했다. 오직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겉치레의 고된 노역들이 미화작업이니 윗분에 대한 기본 예의이니 하는 이름으로 끝없이 계속 되었었다. 인격․인권․자율․자존심 이런 것은 군대에 대해서 너무나 모르는 한가한 사람들의 말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렸다.


더운물에 목욕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과 고된 훈련 때문에 겨울철이 되면 동상 환자가 속출했다. 나는 환자 한사람 한사람의 발가락을 만져가며 심한 정도를 분류하여 다음날 이들을 이끌고 대대 의무실로  갔다. 군의관은 병사들에 대한 이런 나의 배려에 대해 매우 못 마땅한 표정이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환자들을 훅드려 야단치며 퉁명스러운 말로 대하였다.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내 곁으로 오더니 “표 중위 님, 동정심을 발휘하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사병들을 인간적으로 대하면 큰 일 납니다. 그러다가 꾀병 환자가 무더기로 나오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러십니까?”라고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나는 너무나 놀랬다. 그래도 군의관만은 다른 장교들과는 다른 인간미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한 술 더 뜨지 않는가! 아마 그 군의관도 군의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때 선배들로부터 그런 류의 경험담을 수 없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라고 말들은 거창하게 하지만, 바로 국민인 병사들은 그토록 불신 당하고 멸시받고 있었다. 어디를 가도, 그 누구에게도 대접받지 못하고 체이고 욕먹는 천덕꾸러기들이었다. 경험이 많다는 고참 중위들은 늘 하던 말 그대로 “군대란 원래 그런 거야” 했다.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병사들을 향한 나의 입은 여전히 거칠고 습관화된 주먹질과 발길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98년 여름, TV에 나가 특강을 하고 나서 잊고 있었던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었다. 그 중에는 군 복무를 하던 중 맺은 인연 아닌 인연에 얽힌 사람들도 있었다. 함께 근무했던 한 병장에게 전화가 왔다. “표 소위 참말로 똑똑했지요”라는 말을 듣고 “뭐가 똑똑했습니까?” 물어봤더니 “사람 잘 팼지요. 한마디로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주먹으로 병사들의 얼굴을 치며 군기 하나는 확실히 잡았었다고 한다. 서로 크게 웃기는 했지만 씁쓸했다.


이제 우리들의 후배들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자. “귀관들은 형편 있다. 귀관들이 맞이하게 될 부하들 모두가 형편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우리처럼 형편없이 되어버린 전철은 절대로 밟지 않도록 말이다.




세월이 가도 채우지 못한 허전함


육군사관학교 시절 기초 군사훈련은 지금 생각해도 끔직하다. 오죽하면 지옥 훈련이라고 했을까? 미국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에서도 기초 군사훈련 과정을 ‘짐승 길들이기 훈련’(Beast-Train)이라고 칭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가버리고 지워버릴 듯이 매섭고 혹독하게 정신차릴 수 없도록 몰아 부쳤다. 날이 갈수록 훈련의 강도는 높아졌고 그럴수록 우리들은 더욱 멍청해 지고 있었다.


1958년 7월 16일은 햇병아리 같은 우리들의 첫 장거리 행군이 있던 날이었다. 바람 한 점 없이 날씨는 몹시도 무더웠다. 음식물을 훔쳐 위 속에 씹지도 않고 그냥 쓸어 담듯이 번갯불처럼 점심식사를 해치우고 우리는 행군을 떠났다. 삼육대학 앞을 지나 불암산 쪽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코스였다.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체 억지로 등에 매달린 배낭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쉴 새 없이 달가닥거려 피곤을 더해 주었다. 나를 땅속으로 밀어 넣을 듯 무겁게 머리를 짓누르는 철모는 생각의 기능을 아예 마비시켰다. 나의 분신 M-1소총도 천근 만근 무게로 발걸음을 잡아 당겼다. 우리는 걷다가 뛰고 뛰다가 걷고 정신 없이 따라 갔다. 차라리 계속 뛰어가는 구보(驅步)보다 더 힘든 강행군 중의 강행군이었다.


기진 맥진하여 헉헉거리던 생도들이 여기저기 가을바람에 지는 낙엽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낙오만은 면해 보려고 옆 생도의 부축을 받아 질질 끌려가는 생도. 아예 포기하고 푹 주저앉아 손을 저으며 헐떡거리고 있는 생도.


그래도 그 사이 군인 맛이 들었다고, 다른 것은 다 풀어 헤치고 맡겨버렸는데도 소총만은 꼭 쥐고 놓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모습들이 차라리 애처로웠다. 제2의 생명이라 했으니 놓치면 죽는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날마다 선착순 뺑뺑이를 돌며 기압을 받고 고함을 지르느라 혼 줄이 끊겨 넋과 기가 다 빠진 우리들에게 그 날의 행군은 너무나 힘겨웠었다. 가까스로 종점까지 돌아온 생도들도 여기저기 비틀거리며 쓰러져 있었다. 지나가던 한 선배 생도가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처져있는  허전 생도의 이름표를 보고 “허전하구먼!” 하던 말이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수많은 낙오자를 낸 첫 강행군, 그 날 저녁 우리는 너무나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였다. 쓰러져 후송되었던 두 동기생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가 버렸다. 열사병이라고 했다. 우리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계속 바쁘게만 끌려 다녔다.


며칠 후 B연병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고등학생 교복을 단정히 차려 입고 단아한 모습으로 단상 위에 선 고(故) 고창익 생도의 여동생이 읽은 그 애절한 고별사는 식전을 완전히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걸레 취급받듯 이리 밀리고 저리 쫓기며 고생 고생한 생각, 부모님 생각, 무엇인가 목숨 바쳐 큰 일을 이루고 말겠다는 각오, 정의를 위해 뭇사람들 앞에서 총알받이가 되어 죽어도 좋다는 다짐 등 가닥 잡히지 않는 상념들이 밑도 끝도 없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우리들을 묶고 있던 모든 틀이 한꺼번에 풀려버리는 것 같은 해방감으로 우리는 어린애처럼 엉엉 목놓아 울었다. 꼭 동기생의 죽음이 불쌍해서 운 것만이 아니었다. 한없이 처량해 보이는 나의 모습을 보고 통곡했었다. 그 날 저녁 취침 나팔소리는 우리들의 간장을 애이듯 더 구슬프고 허전하게 들렸다.


다시 새날이 밝았다. 어제의 일은 깡그리 흘려 보내고 우리는 늘 해오던 그대로 다시 뛰고 소리 지르고 또 직각 보행, 직각 식사를 하며 정신 없이 보냈다. “귀관들은 세상에서 제일 강한 강철로 만들기 위해서 용광로 속에 넣어진 쇠붙이들이다”라 했다. 가해지는 풍로불의 열기는 갈수록 뜨거웠다. “귀관들은 벼랑에서 던져지고 있는 사자 새끼들이다”라 했다. 두 형제 새끼를 버려 둔 체 우리는 다시 던져지기 위해 다음 벼랑으로 옮겨지고 또 옮겨졌다.




동서고금 어느 나라 군대를 막론하고 양성 과정에서의 훈련은 가장 철저하고 강도가 높다. 인간의 한계정세에 도전하는 강인함을 단련하기 때문이다. 훈련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것은 부주의로 발생하는 안전 사고의 성격과는 다르다.


이 험하고 거센 파도를 해쳐 가노라면 반드시 우리의 이 허전함을 달래고 채워 줄 무엇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우리는 견뎌 왔다. 그러나 세월이 가고 가도 “군인이란 실전과 같은 무서운 훈련을 통해 단련된다. 모진 훈련 중에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이런 단순한 상식 외에 두 동기생의 죽음에 대해서 가슴에 와 닿는 진지한 답을 얻지 못했다.


현충일 때마다 우리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아간다. 이미 그곳에 있는 동기생의 수도 그 사이 많아졌다. 젊은 날 느꼈던 것과 같은 감회가 세월이 갈수록 옅어지는 것은 꼭 우리들도 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존재 이유, 가야할 길을 밝혀주는 꿈이 상급생들의 정리되지 않은 몇 마디 단어 속에 있는 양 순진하게 따르고 전하는 것뿐이었으니 이렇게 허전할 수밖에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허전하게 누어 있었던 허전 생도는 포병 장군으로 전역한 후 목사가 되어 지금은 서울 근교의 한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세월이 가고 또 가도 채우지 못한 그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NLL전사자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 <오마이뉴스에서 퍼옴>
훈장 받으려 고문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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