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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3) 역사 속에 답이 있다.

2007-10-17 09:30:40, Hit : 8434

작성자 : 표명렬
 3. 역사 속에 답이 있다

화랑의 후예라니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명칭을 ‘화랑대’라고 부른다. 이것은 육군사관학교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관 생도들을 향하여 ‘화랑의 후예들’임을 강조한다. 이 말이 과연 온당한가? 생각해 보자. 사관생도의 정체성에 관련된 용어를 민족사에서 찾으려면 무엇보다 그것이 역사적 진실이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납득하고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사관학교를 다닐 때나 지금이나 한번도 내 존재 의미와 사명 그리고 지향하여야 할 꿈을 ‘화랑’에 연관시켜 생각해 본적이 없다. 물론 상급생들은 자주 이를 들먹이며 일종의 정신교육을 하려 하였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화랑도는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민족정신의 발흥을 위해서 ‘상무정신의 상징’, ‘청년문화의 꽃’으로 삼고자 작위적으로 미화하여 설명된 부분이 아주 많은 내용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한국전쟁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이었던 역사학자 이선근 대령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한국사에서 “청년문화의 유산을 발굴하라”는 지시를 받고 『화랑도 연구』(1954)를 출판하면서 갑자기 위대한 청년문화의 유산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사료에 의하면, 상무정신에 초점을 맞춘 이 내용은 실제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화랑이 무인들의 집단이 전혀 아니었다는 것과 세속오계는 화랑과 무관한 서민청년들의 생활 규범이었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정신적 힘의 원천이 바로 화랑도였기 때문에 그 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우리도 통일 대업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미로서 ‘생도들은 화랑의 후예들이다’ 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통일은 지나간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왕실간의 쟁투와 그것의 결과로서 이루어진 하나의 사실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할 것도 그렇다고 나쁠 것도 없는 역사적 사실에 불과하다.


훈육을 목적으로 한 상징성은 생도들의 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내용은 생도들의 가슴속에 파고 들 수 있는 깊은 의미를 담아야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갈수록 설득력이 약해져 형식화되고 의미의 확대 재생산이 불가능하다.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때문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아는가?


1907년 초 안창호, 이동영, 노백린 등 3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서울에 모여 항일 결사조직인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장차 나라가 일제에 탈취 당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에 민족독립운동도 장기전으로 갈 것으로 판단하여 해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이희영 등 동지 몇 명이 만주 삼원보 땅에 가서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군대를 양성해야만 한다고 외치면서 ‘신흥강습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우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신흥무관학교’의 효시이다.


초대 교장은 석오(石吾) 이동녕이었다. 그가 새벽 조회 때 수백 명의 사관생도를 앞에 놓고 엄숙히 훈계한 말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일부를 소개하면 “대한의 청년 동지 여러분! 지금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우리가 추운 땅 만주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소정의 교육을 받는 것은 조국을 다시 찾겠다는 군인 정신의 총화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견디는 고된 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과 인내심을 길러 무관으로서의 기백과 담력을 키우자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신흥무관학교는 1911년부터 1919년까지 3500명의 20대 초반의 청년들을 집중 육성한 우리 민족의 군사학교다. 여기서 소정의 교육을 받은 청년사관들은 곧 실전에 배치되었다. 항일 무장 투쟁사에 기리 빛날 봉오동 전투(1920년 6월)와 청산리 대첩(1920년 10월)에서 기간 요원들은 모두 이곳 ‘신흥’ 출신이었다


제2대 교장이었던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은 “신흥무관 학교는 우리 민족의 최초의 사관 집단 육성소로서 그 정신이 곧 애국애족의 효시요 요람인 것이다. 나는 이것을 참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애국적 군인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8. 15를 쟁취할 수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광복 이후 초대 부통령이 되었던 그는 만주벌을 누비던 신흥의 높은 기상을 늘 잊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동녕은 1919년 4월 13일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선포할 때 그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지금의 국회의장)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부터 우리나라는 대한민국입니다. 군주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입니다.” 이 때의 감격스러웠던 대한민국 선포 식에서 50대의 그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는 1940년 3월 13일 중국 기강의 낡은 임시정부 청사 2층에서 7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동녕 주석이야말로 우리 육군사관학교의 자랑스런 초대 교장이다. 그러나 그의 초상이 육사에는 걸려 있지 않다. 우리가 육군사관학교에 다닐 때 그랬듯이 지금도 생도들은 그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항일 독립전쟁에서 장렬히 목숨 바친 자랑스런 선배님들의 거룩한 넋들이 모아져 우리 국군이 창설되었고 우리 육군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는 이런 자랑스럽고도 감격스런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이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지내왔다.


역사왜곡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그 친일 세력들에 의한 고의적인 역사의식 말살과 민족정기 훼손 작업에 휘말려 우리 국군의 역사, 우리 육군사관학교의 역사는 너무나 왜곡되게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잘못된 내용을 오랫동안 열심히 가르치고 듣다보니 그들이 원하고 유도한바 그대로 우리의 의식이 형성되어 고착화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민족혼이 빠진 군대, 민족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는 군 간부들을 양산하게 되었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희생하신 선배님들 앞에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군은 민족의 빛나는 항일 독립전쟁 과정에서 탄생한 우리 국군의 위대한 건군 사상과 이를 실재 군사력으로 뒷받침한 육군사관학교의 건학 이념 및 정체성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립하여 친일세력들이 만들어낸 왜곡된 역사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국군의 효시는 광복군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이는 군대생활 시절, 가장 많이 듣고 외치던 말 중의 하나다. 여기서 ‘민족’ 이라는 말이 ‘국민’보다 훨씬 더 우리의 가슴에 가깝게 와 닿는 것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역사성과 문화적 동질성을 함께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말에는 문화가 꿈틀거려 이어지고 정(情)이 서려있어 정신적 일체감을 불러일으키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것은 미군 등에는 없는 우리 국군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이다.


우리 장병들에게 일깨워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장병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국군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자부심이 없는 군대는 죽은 군대다.


우리 국군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민족이 비탄의 신음 속을 헤매고 있을 때에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항일 독립 전쟁을 전개했던 위대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또한 북한을 앞세운 공산 진영의 6.25 남침을 단호히 물리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 온 자랑스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국군 장병들에게 우리 국군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하기 위해서는 우리 국군이 우리 민족을 위하여 걸어온 이러한 빛나는 역사와 자랑스런 전통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 중에서도 국군 창설 과정의 민족사적 의의와 역사성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내가 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처음 군대 생활을 시작 할 때 대한민국 국군의 효시는 ‘국방 경비대’라고 배웠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설명이 이어지지 않았다. 국군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어서 이 중요한 국군 역사의 부분에서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그냥 지내온 것이다. 


만약 “우리 국군의 시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라고 역사적 사실 그대로를 알려 주었다면 그 교관의 눈에서는 광채가 났을 것이고 목소리는 자랑스러움에 떨렸을 것이다. 그렇게 무 덤덤하게 몇 마디로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더 크게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그리고 민족 앞에,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행동해야 하겠다는 깊은 생각을 하며 더욱 입술을 굳게 물고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국군은 첫 시작부터 친일 세력들의 의도대로 가장 중요한 민족이라는 의미를 배제한 체 출발하였다. 자랑스런 마음으로 가슴 벅차게 느껴야 할 국군의 이념과 존재 의의 등을 우리는 그냥 건성으로 외우며 스쳐 지나갔을 뿐이다. 마음에서 울어 나오는 자부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대한민국의 법통은 항일 민족 독립전쟁의 주축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으로 왕실에서 벗어나 민국(民國)이 건립된 그때를 효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군의 효시는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였던 ‘광복군’이 되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화랑도 정신이나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의 위대한 정신 등은 하나의 역사적 참고 사실은 될 수 있어도 우리 국군사의 구체적인 정신적 모체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우리 국군 정신사의 가장 중요한 항일 독립 전쟁의 자랑스런 역사의 부분은 삭제해 버리고 왕실 시대로 멀리 거슬러 올라가 화랑도 정신 운운하며 궁색하게 국군의 정신을 말하다가 다시 국방 경비대를 들이밀며 그 정기를 흐리게 해왔다. 이것은 바로 일본 군대 출신의 친일 세력들이 우리 국군을 석권하자 자신들의 반민족적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해서 국군의 정신사적 맥을 짤라 버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우리 국군에 미친 해악의 그림자는 오래도록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문민정부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외치며 해외에 묻혀 있던 독립 운동가들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모셔오는 등 부산했다. 그러나 결과는 기껏 일제의 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일만 요란했을 뿐, 문화와 정신 속에 뿌리깊게 베어 있는 총독부는 조금도 손대지 않았다. 군국주의 일본 군대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우리 국군의 문화와 의식의 개혁이야말로 역사 바로 세우기의 첫 번째 대상이 되어야 함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서도 마찬가지였다.


국군은 민족의 정통성을 이어온 자랑스런 민족의 군대다. 그러나 우리가 민족의 군대로서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일에 소홀한 동안, 본질적으로 계급의 군대일 뿐, 민족의 군대가 될 수 없는 북한군이 마치 민족의 정통성을 가진 군대로 자신을 날조하고 선전해왔다. 전체주의 독재권력을 지탱해주는 하수인에 불과한 북한군과 우리 국군은 본질적으로 엄연히 다른데도 말이다. 민족의 군대로서 국군의 정통성과 혼을 되살려 내야 한다.




반쪽 짜리 공개


새 천년 들어 몇몇 뜻 있는 정치인들에 의해서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의 명단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광복 후 57년이 지나서야 겨우 일부 명단만 공개되었는데도 그 대표적 극우 냉전 수구 신문은 사안의 중요성에 관한 본질문제는 덮어버린 체 발표과정의 절차상에 무슨 큰 잘못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엉뚱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국민들의 관심을 지엽적인 문제에만 쏠리도록 안간힘을 다했다.


이렇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친일 세력들과 그들을 적극 대변하고 사수하듯 감싸고 있는 나팔수들이 탄탄히 자리 잡아 사회 각계 각층을 장악, 실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의 영향력 때문이었는지 가장 먼저 발표되고 가장 철저히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할 핵심 대상이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일본군 장교로 임관하여 반민족 활동의 첨병으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조국이 적의 침탈을 받아 그 지배 하에 놓여 있을 때, 그 적군에 대항하여 싸우는 무장투쟁이야말로 국권회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항쟁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을 성취한 후에는 반드시 적군 편에 서서 이적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처벌하는 하고, 그러한 역사적 교훈을 후대에 남겨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자랑스런 우리의 독립군과 광복군이 항일 독립 전쟁에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을 때, 일본 군 장교로 자원 입대하여 이들을 제압하고 제거하는 일에 앞장섰던 반민족 세력들은 조국 광복과 더불어 어느 부류의 인사들보다 가장 먼저 응분의 엄격한 심판을 받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불행히도 어지러웠던 해방 정국의 상황에서 미 군정의 의도와 이승만의 정치적 야욕이 합치되어 오히려 이들 반민족 세력들은 군을 완전 장악하고 급기야 정권까지 차지했다. 이 역사적인 과오는 우리 국군의 정신사적 발전의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그들은 민족을 배반했던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행적을 감추느라 국군의 존재 이유가 되어야 할 ‘민족’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제거했다. 그리하여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서려있는 민족의 군대, 인간존엄을 제일의 가치로 하는 민주군대로의 성장을 저해했다.


지금도 그들은 군의 원로로서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갖가지 형태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국군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도 그들의 명단은 반드시 공개되어야 한다. 그들의 정신적 볼모로부터 국군을 풀어주어야 한다.




안중근 의사와 우리 군의 전통


우리 민족 고유의 군사 사상을 몇 마디로 표현하라 한다면 첫째는 ‘홍익인간’의 건국 이념에 바탕을 둔 방어 전쟁 사상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민․관․군 일체의 총력전 사상이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문화 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이 땅에서 살아오는 동안 단 한 차례도 다른 나라를 먼저 침략 공격한 적이 없다. 방어 전쟁만으로 5천년 역사를 지켜온 위대한 민족이다. 그러나 일단 적의 침공을 받았을 때는 민․관․군이 따로 없이 모두가 한데 뭉쳐 끝까지 싸우는 총력전으로 나라를 지켜온 자랑스런 민족이다. 왕실간의 권좌 쟁탈을 위한 전쟁도, 종교적 분쟁의 전쟁도, 계급간의 전쟁도, 식민지 쟁탈이나 경제적 이익의 전쟁도 아닌 우리 민족사에만 있는 ‘의병전쟁’이라는 독특한 전쟁의 형태가 바로 우리의 군사 사상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군사 사상을 기조로 한 우리 국군의 정신적 전통은 향토수호의 의병전쟁, 광복군의 항일 독립 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면면히 이어 내려온다. 그 중에서도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왔던 광복군의 빛나는 활약상은 우리 국군의 자부심을 드높일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근거요 힘이다. 그런데도 우리 군 어디에서도 이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간부들에 의해서 치러졌던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의 그 자랑스런 피가 우리국군의 맥박 속에 면면히 흐르고 있건만 군을 장악하고 있었던 친일 세력들은 그 장엄한 항일 독립 전쟁의 발자취에 대해서 눈과 귀를 막고 폄하해 왔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직후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고 난 후 “나는 우리나라의 의병참모 중장이다. 포로로 대접하라”고 의연하게 말씀했다. 그러나 광복이 된 후 지금 까지도 우리 군은 그를 대한민국 국군의 선배로 대접하지 않고 있다. 항일 독립 전쟁에서 광복군․독립군의 이름으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선배님들이 너무나 많았었건만 우리는 그 분들의 행적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군 정신교육의 근본적인 개혁이 절실하다. 특히 사관학교 생도들을 비롯한 양성과정의 훈육은 전면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 사관학교의 생도 정신교육을 전담하고 있는 훈육은 대학과정의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과는 구별된다. 사관학교에 들어서면 안중근 의사의 애국 혼을 흠뻑 느낄 수 있고 광복군 선배님들의 빛나는 승리의 발자취를 확인 할 수 있어야 한다. 윤봉길 이봉창 선배님 등 위대한 우리 선배님들의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릴 수 있어야 한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아니었던 시대에 왕실을 지키기 위한 군인이었던 화랑 관창을 예를 들어 그의 애국심이 어떻고 하는 시대착오적인 말들은 더 이상 오가지 말아야 한다.




동대문 창신동의 눈물


1986년 9월 17일, 광복군 창군 제 46주년 기념일을 맞아 나는 당시 참모총장을 설득하여 광복군 선배님들을 육군본부에 모셔 대접하는 기념행사를 가졌다. 우선 먼저 광복군 동지회 사무실을 방문하여 행사 계획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었다. 동대문 창신동의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서너 평의 어둠침침한 방안에 몇 분이 모여 계셨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분들에 대해 우리가 너무나 무관심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선배님들은 조금도 개의치 않으시고 의연 당당하셨다.


광복군 선배님들은 우리 군대 내에서 수적으로 너무 열세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부귀영화를 쫓아 일본군에 몸을 담은 처세술에 능한 분들과는 경쟁이 되지 않아 거의 광복 후 군의 요직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대부분 성격이 곧고 불의를 참지 못하시니 세상 살아가기가 고달프시고 어려웠으리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또한 미 군정 당국과 군사 고문단의 입장에서는 우리 군대를 만들 당시 기능주의적 관점으로만 판단하였기 때문에 누가 더 총을 잘 쏘고, 각개 전투를 잘 하며 중대 전술 등 정규 훈련을 더 많이 받았느냐가 중요했다. 민족의식, 애국애족 같은 것은 그들에게 오히려 골치 아픈 부담이었을 지 모른다. 이렇게 되어 마침내 우리 군은 친일 세력들의 독무대가 되었다.


노령의 선배님들은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했다. 의장대의 분열이 있을 때는 눈물을 흘리시는 선배님들이 많으셨다. 국군으로부터 이런 정식의 대접을 받기는 처음이라 하시며 깊은 감회를 감추지 못했다. 분열이 끝난 다음 대강당에서 ‘항일 독립 전쟁 정신’이라는 연극을 관람하고 육군 회관에서 만찬을 하였다.


만찬 장은 감동의 도가니였다. 선배님들이 일어서서 ‘광복군 군가’를 눈물을 쏟으시며 부르실 때의 그 비장한 모습을 보며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육군 본부 장군들과 노(老)선배님들이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푸른 하늘 은하수’도 불렀고 ‘전우의 시체’도 불렀다.




‘만인의총’과 ‘마사다’


우리나라 방방곡곡에는 의총(義塚)이라 불리는 이름 없는 분묘들이 많이 있다. 이는 외적의 침략에 맞서 의롭게 싸우다 목숨을 바치신 선조들의 거룩한 뼈가 묻혀 있는 무덤들이다. 일제는 36년의 식민 통치 기간 동안 우리 민족의 혼을 없애기 위하여, 민족 정신과 문화 말살 정책을 집요하게 펼쳤다. 민족의 자존심을 일깨우고 민족정기를 이을 만한 이런 자랑스런 선조들의 발자취를 없애려는 노력은 계속됐다. 우리 조상들이 피 흘려 나라를 지켜온 거룩한 발자취인 의총들을 그대로 둘 리가 없었다. 거의 다 파 해쳐 흩어 버렸다.


그 중에서도 그 규모나 의의가 큰 대표적인 의총으로는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萬人義塚)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에서 왜군과 싸우다 밀려온 의병들과 관군들 그리고 전라도에서 몰려든 의병들이 이곳 남원 땅에 모여들었다. 근방의 남녀노소를 불문한 주민들도 합세, 한 덩이가 되어 끝까지 싸우다가 마침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마친 민족의 넋이 서려있는 성스러운 무덤이다.


만인의총은 이스라엘의 마사다 못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민족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일제 점령 기간 동안 파 해쳐져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렸던 유골들을 광복이후 다시 모아 분묘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그 위대한 정신을 이으려는 노력은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조상들의 거룩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체, 아직도 복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점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스라엘에서는 군의 모든 간부들이 임관되기 전에는 반드시 마사다 요새에 들려 참배를 하면서 그들의 피에 조상들의 거룩한 정신과 혼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적으로부터 포위되었거나 곤경에 처했을 때는 “마사다!”라는 함성을 지르며 용기를 북돋는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선조님 들이 남기신 위대한 넋을 이어 받아 민족을 위해 나를 불태우는 희생의 각오를 다지게 할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 많이 있지만, 민족 의식을 드높이고 역사 의식을 제고하는 교육은 일본 식민사관에 세뇌된 친일세력들과 그들로부터 교육을 받아 오로지 권력에만 탐하던 사람들이 주도했던 독재정권에 의해 고의적으로 차단되어 왔다. 사관생도 교육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통치 하는 데 앞장서 왔던 일본군 출신들이 조국 광복 후 우리 군을 너무나 오랫동안 너무나 철저히 장악한데서 비롯된 비극적 결과다. 우리 국군의 가장 자랑스런 역사요 전통인 항일 독립 투쟁기에 그들은 가장 반민족적이고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국군 정신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항일 독립 전쟁의 내용을 모조리 삭제해 버린 것이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평생을 바쳐 순국하신 선조님들의 유골을 조국의 품안으로 모셔와 국립묘지에 안장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런 일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실행할 수 있는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분들의 위대한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그 성과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두고 꾸준히 추진되어야 할 일이다. 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것처럼 외형적인 것을 없애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우리 의식 속에 일제가 심어 놓은 문화와 정신을 씻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득권의 위치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친일세력들, 특히 친일 행각을 벌려왔던 언론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3년 가을, 내가 대구에서 근무하고 있는 동안 나는 처음으로 시간을 내어 만인의총을 참배하였다. 두 손으로 분묘를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못난 이 후배들이 그토록 위대한 선조들의 정신을 기리지 못하고 있음을 생각할 때 너무나 송구스럽고 슬펐다. “선배님들이시여! 부끄럽습니다. 죄송합니다”를 울부짖으며 선배님들의 거룩한 희생의 정신을 어떤 형태로든 구현해 내겠다는 약속을 드렸다.(사진 참조)


내가 정훈감의 직책을 맡은 후, 당시 연극협회 회장이었던 김의경 씨의 도움을 받아 국군의 정신적 모체요 발원인 의병 할아버지들의 정신을 이어 받자는 의미로 ‘만인의총’을 연극으로 만들어 공연토록 하였다. 연극 대본은 만인의총이 있는 남원 출신의 작가 노경식 씨에게 부탁했다. 첫 공연을 남원시에서 열었다. 잊혀져 가고 있는 조상들의 위대한 넋을 기리게 하고 자부심을 일깨워 주어 고맙다며 남원시민들이 정성어린 감사패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군대생활 하는 동안 수많은 기념패 등을 받았지만 지금은 거의 버려 버리고 없다. 그러나 광복군 선배님들이 특별히 이름을 새겨 전해주신 도자기와 이 감사패만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만인의총에서 고해 올렸었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음에 죄스러울 뿐이다.




역사적 전환


광복의 달 8월이 되면 광복 이후 우리 현대사 속에서 비뚤어지거나 실종된 민족정기 확립과 각 부문의 위상 재정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광복 이후 현대사에서 가장 심한 위상 혼돈을 겪은 부문은 우리 군이고 역으로 우리 군의 이러한 일탈은 우리 현대사를 왜곡시키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제국군대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들의 권력에 빌붙고자 했던 세력들은 미군정 아래서 다시 생존의 터전을 마련하고 남한 군 조직의 핵심부에 자리를 잡은 뒤, 6.25를 거치는 동안 완전히 군을 장악하다 시피 했다. 국군의 수난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 군은 민족을 식민 통치의 수단으로만 여겨 멸시 천대 군림해온 일본 제국주의 군대에 맞장구쳐오던 사람들에 의해 너무도 긴 세월동안 주도되어와 민족의 군대로서 민족의 자존심을 펼칠 수 있는 건군 사상이 정립될 리 만무했다. 군사 사상이 없는 군대는 혼이 없는 군대라 했다. 군사 철학이 정립되지 못한 군대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군사제도를 갖추기 어렵다. 민족의 군대로서의 군 본연의 막중한 사명을 세우고 뿌리내려야 할 군의 본령을 팽개쳐버린 5.16 군사쿠데타는 그러한 비극 속에서 잉태된 전형적 사건이다.


광복군의 민족 자주 독립 정신이야말로 구체적이고도 확실한 우리 국군의 정신적 지주이다. 이제 국군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갈 대 전환의 희망찬 미래가 우리 앞에 열리고 있다. 우리 국군에 대한 새로운 이념과 사상, 즉 ‘건군 사상’과 ‘군사철학’을 정립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군 개혁은 다시 한번 좌절되고 말 것이다. 광복군의 정신을 우리 국군의 정통 정신으로 계승한다는 사실은 일그러졌던 우리 국군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실로 가슴 벅찬 역사적 전환이다. 우리 국군사의 새로운 획을 긋는 큰 전환점이 될 것이다.


늦었지만, 국군의 원 뿌리인 광복군 창설일(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여 새로운 민주군대, 민족의 군대로서의 발전을 마음껏 격려하고 경축하는 것에서 우리 국군의 새로운 탄생을 시작해 보자.






4. 군대에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가




의문사(疑問死)와 구조개혁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는 우리 군대 내에는 아직도 고참병의 횡포를 비롯하여 인권 면에서 문제가 많다는 사실을 발표한 바 있다. 인간존엄의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사회가 되었음에도 우리 젊은이들이 아직도 그런 분위기에서 의무 복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참으로 기이한 것은 국민적 관심사가 될 수 있는 이런 중대 사안이 군에 입대해야 하는 젊은이들이나 군 복무를 마친 장병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이다. 언론 역시 이러한 사건을 단순 보도로 처리하면서 군 개혁의 필요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민주화되었다고 말하지만, 국민의식과 정치는 아직도 권위주의적 문화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가지 여운이 남는다. 군대에는 인권이 없어도 되는가.


한 TV 프로그램에서 군대 내에서의 의문사에 관한 내용을 시청한 적이 있다. 아직까지 그런 억울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니 군의 민주화 개혁이 참으로 시급함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우리 군은 오랫동안 독재정권의 중심 세력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적 군대문화 건설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일대 수술을 가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병에 걸려 있다 할 수 있다. “군대란 원래 그런 것이야”만 되풀이하며 제대로 된 진단도 하지 않고, 치료도 없이 그대로 방치되다시피 지내왔으니 그 병은 점점 만성화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은 이제 병이 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무뎌졌다.


아들 허 일병의 의문사를 규명하기 위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쳐 온 몸으로 절규하며 노력해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이런 나라, 이런 군대가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99년 9월 7일 어느 일간지의 발언대 코너에도 군에 입대한 아들이 상급자의 폭력으로 사망한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아버지의 애절한 기사가 실렸었다.


그의 부친 최상구 씨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군 폭력은 줄었다지만 일반 사병에게는 여전히 엄연한 현실로 존재하고 있다. 언제까지 남의 일로만 여길 것인가? 우리의 무관심 속에 지금도 우리의 아이들이 상사의 쇠파이프에, 군홧발에 계속 죽어만 가는 이 비통한 현실을 국방장관, 군 지휘관 여러분들은 정말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묻고 싶다. 폭력으로 죽어 가는 우리 아들들 앞에 민주주의가 어떻고 인권이 어떻다고 논할 자격이 있는가? 근절대책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군 폭력 살인은 앞으로도 계속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들을 죽인 가해자가 아니라, 폭력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미워한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아들이 마음 아파할까 봐 가해자를 용서해 달라는 탄원서를 냈다.”


고(故) 최재원 일병과 허일병의 아버님과 가족들의 피맺힌 슬픔에 깊은 위로를 드리며, 아울러 이를 근절하기 위한 당국의 진실하고도 실효성 있는 노력이 부족함을 개탄한 그의 질책에 대해 전적으로 동감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도 가해자를 용서하며,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를 탓하는 그 높은 인격에 마음으로부터 경의를 표한다.


군에서 ‘폭력 절대 금지’를 내걸고 서슬 퍼렇게 강조하며 위반 시에는 엄벌에 처해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의한 살인이 근절되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지금까지 해온 것과 같은 피상적인 강조 일변도만으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그 분이 말한 대로 구조를 개혁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지금까지는 “절대로 하지 마라”, “하면 혼낸다”만을 요란하게 강조해 왔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는 매우 강력한 방법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지휘관들에게는 “내가 그토록 끊임없이 강조해 왔고, 교육하고 지시했는데 또 발생했다”는 식의 책임 회피에 아주 편리한 방법이다. 이러한 처벌 위주의 접근은 잠시 동안은 조용하게 만들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우리 군은 폭력이 자행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있는 비뚤어진 군대문화의 개혁을 위한 근본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특히 간부들의 잘못 형성된 의식구조와 리더십이 바로 이런 토양을 만들고 있음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군대의 모습은 그 시대 간부들의 사고 방식과 행동 양식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우리 군의 간부들에게 인간 존엄의 가치관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으로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을 함양시키기 위한 노력이 교육과정 및 간부의 자질 평가 등 어떤 측면에서도 제도적으로 장치되지 않았었다.


몇 년 전 김척 예비역 중장이 그의 아들 김훈 중위의 죽음에 대해 그것은 분명히 타살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진실 규명을 위해 동분서주 애쓰던 외로운 몸부림을 잊을 수 없다. 그의 그런 노력에 대해 고급간부출신들 간에는 “예비역 장군의 신분으로 군의 입장도 좀 생각해서, 조용히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도대체 군의 입장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결코 자기 아들의 누명만을 벗기고자 애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군에서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도 책임 면제로서 가장 좋은 방법인 자살로 처리됨이 반복되는 잘못된 구조를 차단하고 진실을 투명하게 파헤칠 수 있는 제도 구축을 위한 진정한 용기였다고 나는 믿는다.




군대와 여성


내가 정훈감을 맡고 있던 80년대 당시만 해도 학력 면에서 자질이 우수한 정훈 장교들은 취업이 용이하기 때문에 군에 오래 남지 않고 제대하는 경향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취업문이 너무 좁아 고학력의 자원들이 많았지만 사회 진출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나는 이들을 정훈장교로 활용해야겠다고 오래 전부터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전에 없던 새로운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육본 정책위원회의 심의과정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통과를 시켜주지 않은 것이다.


여러 가지 반대의 말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상의 주된 이유는 정책회의 의장인 참모 차장이 이 안을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위원들이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나는 굽히지 않고 계속해서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어렵게 결정이 되었다. 당시 나의 구상은 전체 정훈장교의 30% 정도의 인원을 점차 여자 정훈장교로 대체하려 했었다.


나의 예상은 적중했다. 6명의 장교를 선발하는데 쟁쟁한 인재들이 구름 때처럼 모였다.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기어코 성공 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이 한층 무거웠다. 모든 선발과정을 내가 직접 최종 확인했다.


당시 국방부의 고위직에 있던 선배와 육본의 중요 직위에 근무하고 있던 선배가 나를 불러, 특정인을 합격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선배님 아시다시피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정착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 입니까! 무수한 반대를 무릅쓰고 시도하는 것이니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하고 오히려 내가 통사정을 했다.


감격스런 여자 정훈장교의 임관식을 마치고 나니 여러 가지로 걱정이 되었다. 가장 염려스러웠던 것은 내가 만든 이 제도 때문에 군에 들어온 그들의 인생에, 군대생활이 혹시 상처로 남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군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남성들만 있는 군인 세계에 여자 장교를 배치했을 때 만약의 불상사라도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질지도 모르지만 군의 체제가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게 되어 있다. 다만 지휘체제의 밖에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무소불위의 특권을 누리고 있었던 기무사 요원들이 마음에 걸렸다.


실제 당시 동부 전선의 한 전방 사단에서는 보안부대장이 야전병원 간호부장과 짜고 간호사관학교 출신 간호장교를 속초 지역 호텔로 유인하여 문을 잠그고 구타하며 강제 성폭행을 한 파렴치한 사건이 있었다. 그 간호장교는 장차 수녀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군종 신부가 아니었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되었을지 모른다. 사단장도 신부더러 입다물고 있으면 조용할 문제니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달라고 간청했었다고 한다. 별 달고 부하들 앞에서 거드름 펴던 지휘관들도 보안부대장에게는 거의가 이 모양이었다.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이 같은 일은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그들의 소속을 모두 육본 정훈감실로 하였고 “항상 개인적이거나 공적이거나 상관없이 중대하고 긴급하다 싶으면 나에게 직통으로 전화하라”고 강조했다. 아마 그들은 내가 왜 꼭 그런 약속을 했는지 몰랐을 것이다.


이제 여자 사관학교 출신까지 배출되었으니 인터넷이나 휴대전화를 통해서 각종 여성단체 등에 직접 연락하는 등 군대 내에서의 성폭행 방지에 대하여, 나처럼 마음속으로 꿍꿍거리며 방법을 모색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확실한 예방 조치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문제는 선진 외국군의 경우를 참고하여 제도를 건립 운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남․여간의 성(姓)에 대한 사회적 인식, 조직 문화의 특성, 특히 군대문화의 특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사단장이 회식 장소에서 성 추행한 사실이 보도되어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지만, 공개된 장소에서의 그런 내용은  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기무사 요원의 감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기관원들이 개인의 약점을 이용하여 조사, 파악, 문의 등의 이유를 들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감시 견제하는 강력한 제도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불행한 역사적 경험과 반(反)인권


군대생활을 많이 해서 군대를 많이 안다는 사람들일수록 “군대란 인권 따위를 운운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니야. 전쟁들을 안 해봐서 그런 헛소리들을 하는 거야” 라며 전투 수행의 기능적 특성만이 군대의 전부인 양 말한다. 이에 영향을 받아 간부들은 물론 의무 복무를 마친 사람들까지도 “군대란 특수 집단이기 때문에 그 말이 맞아” 하며 문제의식을 자각하지 못한다.


군대는 전투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생명까지 바쳐서 명령을 관철하는 조직으로서 국가가 폭력을 합법화 시켜준 특수 집단이다. 전투에서 승리라는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지휘관의 명령에 절대 순응하고 주어진 임무를 무조건적으로 관철해야 한다. 나의 생명을 바쳐 적의 생명을 노려야 한다. 역설적으로 그 어떤 조직보다 생명의 고귀함에 대한 경외심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인간존엄의 가치관이 뚜렷해야 한다.


따라서 전투 중이거나 훈련 중이 아닌 상황에서 일반 부대관리에서는 어느 조직보다 개개 병사들의 인권이 존중되고 배려되고 있음을 병사들 자신이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가 보장되지 않으면 군 복무의 이유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통일을 준비하는 국방정책(2)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동아시아출판사 표명렬 저 2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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