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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목이터져라 외친 "예! 1686번 표명렬 생도" <군개혁에 바친 내인생>

2007-11-02 08:53:07, Hit : 6358

작성자 : 표명렬
 2.목 터져라 외친“1686번 표명렬 생도!”

꿈에도 그리며 그렇게 갈망하던 사관학교 입교 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할아버님과 아버님께 큰 절을 올리고 수많은 동리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득의양양 광주행 버스를 타기위해 면소재지인 원동리 까지 갔다. 어머님께서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오셔서“조심해라! 매사에 신중해야한다!” 당부 말씀 하셨다. 만나는 사람마다 “웜매! 참말로 잘 되었소 잉!”하며 어머님과 나의 손을 잡아주셨다. 어머님께서는 “다 덕택입니다. 그냥 군대에 들어가는 것이랍니다!”라며 개면적어 하셨다.


지방의 합격자들은 입교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대부분 미리 서울에 올라와 학교 앞의 배나무 밭 있는 집에서 하루 밤 하숙을 하고 들어갔다. 모여든 모두들 기쁨에 상기된 얼굴이었다. 유난히 목소리 크고 찐한 경상도 사투리와 정감 넘치게 말꼬리가 긴 전라도 사투리가 어울려 왁자지껄 했다. 포항에서 올라 왔다는 삐삐한 친구가 “나 조용암입니더! 형씨! 어디서 왔심니꺼!”하며 고개를 뒤로 재낀 약간 거만스런 모습으로 악수를 청해왔다. 다음날 같은 분대원이 되었는데 동작이 워낙 뜨고 사투리가 심하다고 기압을 많이 받은 인간미 넘치는 좋은 분이었다.


교문을 들어서니 전투복 입은 3학년 생도가 “요놈들! 혼 좀 나봐라!”하듯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띠며 안내해주었다. 모두들 싱글벙글 기분 좋은 표정으로 각기 분대장 생도의 뒤를 따라 배정된 내무반에 들어갔다.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침대 위에는 우리가 사용할 보급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직까지 한번도 신어본 적이 없는 구두가 검은색과 갈색 두 켤레나 눈에 띠었다. 그것도 대부분 사람들이 부러워하던 미국제품(Made in U.S.A.) 딱지가 그대로 붙어 있는 물품들이었다. 팬티에서부터 양말, 러닝, 체육복, 손수건, 실내화, 운동모, 운동화, 필통, 연필, 지우개 등등--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거기 다 있었다. 지난 세월 너무나 가난에 쪼들려서 가지고 싶었지만 염두도 못내 왔던 것들이었다. 이제부터 지난 6년 여간 나를 짓눌러왔던 학비걱정 밥걱정 등 궁핍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꿈인가 생시인가 해졌다. 


분대장 생도들의 시간을 재촉하는 으름장이 있긴 했어도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짧게 깎고 깨끗이 샤워를 하고 나니 마치 암울하고 고단했던 나의 과거를 모두 깨끗이 잘라버리고 씻어 흘려 보내버린 것처럼 금방이라도 하늘을 나를 것 같이 상쾌 홀가분했다. 들어올 때 입고 있던 옷가지며 신고 있었던 신발과 가지고 왔던 물건 모두를 집으로 보내준다며 걷어갔다. 이제 나의 고달프고 어려웠던 슬픈 시절과는 완전히 단절해버리고 희망과 기쁨의 세계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해방감이 온몸에 젖어들었다.


아버님 과거 때문에 끊임없이 감시당하듯 쫓기는 마음에 물질적으로 너무나 어려웠던 청소년시절을 보낸 나에게 사관학교는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가슴을 펴고 당당해질 수 있었다. 어떤 고된 훈련, 아무리 엄격히 통제된 생활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 인생 길에 무겁게 너무나 오래도록 드리워졌던 어두운 장막이 거치고 희망의 밝은 해살이 찬란하게 비춰주게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오랜 세월 움츠리며 풀죽어 살아온 나를 초등학교 3학년 이전의 기세등등하여 고집스러웠던 어린 시절의 본래 내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 시작했다.


훈련은 전적으로 상급생도들로 구성된 근무생도들에 의해서 자치적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고유번호인 교번을 부여받았다. 상급자로부터 “귀관!”하고 지적당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쪽을 향하여 빳빳이 서서 즉시 젖 먹던 힘까지 다하여 할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예! 1686번 표명렬 생도”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내가 얼마나 천지가 떠나갈 듯 크게 소리를 질러댔던지 지금도 나의 교번을 기억하는 동기생들이 많다. 최후의 힘까지 남김없이 다 쏟아 발악하는 나의 처절한 절규의 모습이 명물이 되어 상급생들 간에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래고래 발악하는 나의 처참한 꼴을 보기 위해서 간부 생도들이 일부러 우리 내무반에 와서 “귀관!” 하고 집적거려 지적한 적도 많았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생도들이 그러했듯이 나는 결코 군인이 좋아서 군인으로서의 특별한 꿈을 안고 사관학교를 택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를 졸업하면 장차 내가 장교로서 일평생을 살아간다는 그런 구체적인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소대장 중대장이 되고 장차는 장군이 되고 …등에는 사실상 거의 관심이 없었다. 


생각하면 나는 군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전혀 엉뚱한 꿈을 꾸고 있었다. 오랜 세월 강대국으로부터 권력자들로부터 짓밟히고 당하기만 해온 불쌍한 우리 민족 민초들을 위해서 목숨 바쳐 무엇인가를 이루게 될 것이라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었다. 민족사 앞에 불의가 판쳐온 세상을 바로잡아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는 제멋대로의 비전이었다.


 잔치 상에 올릴 돼지


생도생활 전체를 통해 내가 사관학교에 입교한 목적, 생도로의 나의 존재이유 지향하는 비전에 대해서 진정성을 가지고 심각히 사유 토의 고민하는 그런 훈육의 과정이 거의 없었다. 그러기에“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당연한 구호는 수도 없이 외쳤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도덕적 용기를 배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런 인격과 가치관이 함양 될 수밖에 없도록 면밀히 계획된 훈육제도에 의해 투철한 민족의식의 민족적 자부심을 심어 주어 이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이것이 불가능했다. 민족이라는 낱말에 공포하는 친일반역도들이 군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사관생도 훈육 중에 가장 중요한 기초군사 훈련과정에도 바람직한 훈육 제도건립과 문화형성이 어려웠다. 기초군사 훈련 시 우리를 이끌고 있던 근무 생도들은 정신없이 몰아세우고 닦달하는 데는 이력이 나있었다. 완전히 해골처럼 딱딱하고 표범처럼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너희들은 장차 나라가 필요로 할 때에 언제든지 잡아서 잔칫상에 올리기 위해 살찌워 기르고 있는 돼지 새끼들이다” 부리부리한 눈에 콧구멍이 벌름벌름 마치 돼지 에비처럼 보이던 기초군사 훈련 중대장 생도의 허스키 목소리는 늘 우리를 섬뜩하게 했다. 왜 하필이면 돼지 새끼 들 이란 말인가 ! 그래, 우리가 장차 ‘만족한 돼지’처럼 배만 부르면 아무 고민도 없이 살만 퉁퉁 쪄 살아 갈 것 같은 그런 치사한 존재들로 보였단 말인가?


고향 마을의 명절 때나 뉘 집의 잔칫날이 있을 때면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 돼지를 잡았다. 새끼줄로 네 발을 묶을 땐 온몸을 퍼덕거리며 동리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식칼에 목이 찔려 피를 흘리며 발버둥치다가 결국은 체념한 듯 눈만 크게 뜨고, 허 바람세는 소리를 “푸! 푸!--”내다가 마침내 조용해지면 절구통에 펄펄 끊는 뜨거운 물을 붓고 숨 끊어진 돼지를 밀어 넣어 면도하듯 털을 뽑던 돼지의 최후모습이 눈에 선 했다. 우리가 바로 그런 신세들이라는 말인가?


기왕 돼지 이야기를 할 바에는 “훗날 조국이 부를 때 마지막 살덩이 한 점 ,피 한 방울 뼈까지 송두리째 민족의 제단 앞에 바치기 위해서 귀관들은 여기 모인 것이다. 잔칫날의 돼지처럼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완전한 희생! 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 이런 격려와 기대의 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말투나 표정 어느 부분에서도 그런 의미의 감은 전혀 없었다. 나의 지나친 자격지심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너희들을 이렇게 완전 공짜로 먹여주고 입혀 주고 재워주면서 학사 학위까지 취득할 수 있도록 공부시켜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알아서 기어라! 똑똑히 처신하라며 자존심을 건드는  엄포로만 들렸었다.


그 잔칫날이 나에게는 너무 빨리 닥쳐왔다. 건봉산 앞 험준한 비무장 지대의 중대장 직책을 맡아 물불 가리지 않고 열심히 근무하고 있던 1965년 여름 갑자기 전출 명령을 받았다. 전투부대 제1진으로 월남 파병이 결정되었으니 즉시 홍천의 맹호 부대로 집결하라는 것이다. 


당시 항간에는 전투요원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실재 미국에서는 ‘월남」은 65년도 졸업 웨스트포인트(미 육군사관학교) 출신 초급 장교들의 무덤’이라고 할 정도로 희생이 컸었다.


‘거진’ ‘간성’을 지나서 서 쪽으로 서쪽으로 터덜거리는 3/4톤 차를 달리며 이제 다시는 영원히 이 보다 더 동쪽으로는 오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산과 들 나무와 바윗돌 풀포기 하나에 이르기까지 나와의 영원한 이별을 슬프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난 세월 내 인생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나타났다 없어지고 스치며 지나갔다.


그렇지만 사관학교 4년의 훈육은 전쟁터로 가는 나에게 정신적인 어떠한 경구도 들려주지 않았다. 목이 잘린 체 혀를 내밀고 있는 제사상의 돼지 생각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어머님께서 냉전의 소용돌이에서 허물어져 가는 집안 꼴을 지켜보시면서“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고 가슴으로 들려주시던 말씀이 큰 힘을 주었다.


구 일본식 군대문화의 바탕은 그대로 두고  미국식 제도를 꿰어 맞춘 이래 한 번도 근본적인 검토 없이 금단의 영역처럼 되어온 사관학교 훈육제도 개혁 시급하다. 사관학교 출신 예비역 고급간부들 거의가 극단적인 반민족 반통일 사대주의적 극우 행동대처럼 되어있는 오늘의 현실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하다. 21세기 「인간 존중」의 시대정신에 부합되는 철학과 신념 그리고 그런 인성을 가진 지도자를 육성할 수 있도록 생도훈육 바꿔야 한다. 군을 완전 장악하고 있던 일제 앞잡이들은 사관생도들에게 민족의식이 유입됨을 차단하기 위해서 오로지 전투적 기능인으로만 육성하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던 과거에서 단절 새롭게 깨어나야 한다. 생도들은 감수성이 많은 정의감의 바탕을 갖춘 젊은이들이다. 참으로 아까운 좋은 인재들인데 훈육이 잘못되면 합당한 사회적 인식의 대접을 받기 어렵게 된다. 미국 웨스트포인트 출신들은 서로들 모셔 가려하는 존재가 되어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3.팬티 한벌과 바꾼 목숨 <군 개혁에 바친 내 인생>
1.육사에 합격하다,(군개혁에 바친 내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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