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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육사에 합격하다,(군개혁에 바친 내인생)

2007-10-31 10:35:30, Hit : 6409

작성자 : 표명렬
 1육사에 합격하다

내가 다니던 광주고등학교 선배들 중에는 육사 생도들이 퍽 많았다. 방학 때가 되면 멋들어진 교복을 걸쳐 입고 가슴을 펴 절도 있게 직각 보행을 했다. 꼭 짝을 지어 발을 맞추면서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광주 시내 큰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특히 겨울방학 때 입고 다니는 외투는 그 모양이 특이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가히 당시 젊은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여학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곁눈질할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그들이 모교를 방문할 시는 특별대접을 받았다. 후배들을 모아놓고 사관학교를 소개하는 시간이 배려되었다. 목에 잔뜩 힘은 주어 좀 어색하기는 했지만 차분하고 당당한 목소리로 속 시원하게 사관학교 자랑을 잘해주었다.


일단 합격만하면 모든 것이 다 공짜요 대학 졸업과 똑 같은 학사자격을 준다는 설명에 마음이 크게 쏠렸다. 특히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사관학교에서 육성될 것이라는 말에 매력이 있었다.


신생 독립국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한국을 이끌어 갈 인재들을 가장 조직적으로 훈련시키는 기관은 사관학교뿐이라고 당시 외국 언론에도 자주 보도되었고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미래의 지도자들이 사관학교에서 양성되고 있다며 기대가 자못 컸다. 물론 결과는 엉뚱하게 나쁜 방향으로 흘러버렸지만.


이런 시대적 분위기 따라 나도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역할 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꿈을 안고 육사의 문을 두들겼다. 사실 이는 명분에 불과했고 결정적인 실재 이유는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연좌제가 불거져 사관학교에 진학하겠다는 나의 희망이 좌절되지나 않을까? 해서 아버님께서 얼마나 마음 아프시고 불안해 하실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지 않았으니 나는 참으로 불효 막급한 고집쟁이였다. 아버님께서는 반대는 하시지 않으셨지만 긁어 부수럼 만드는 것 아닌지? 수심이 가득하셔서 수건으로 머리를 메시고 며칠간을 끙끙거리시며 누워계셨다.


당시 사관학교 출신에게는 이학사의 학위만 수여되었고 입학시험도 수학과목 점수에 특별히 가중차가 붙어있었다. 나는 꼼꼼히 따지고 계산해야하는 이과 쪽에는 취미가 없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부터 문과 이과를 구분하여 반을 편성하였는데 우리 학교에 특별히 설치되었던 사관학교 준비반을 택했다.   


사관학교 시험은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다. 먼저 신체검사에 합격 된 자에 한에서 학과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1차 신체검사에는 무난히 합격 했다. 필기시험 합격자는 서울 신문에 공고 발표되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 날이 왔다. 하얗게 눈이 덮인 새벽길을 뽀드득 뽀드득 조심히 달려 서울신문 광주 지국으로 갔다. 다른 친구들도 기차로 내려오는 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떨리는 마음으로 숨죽여 펼쳐보았다. 거기 내 이름 석자가 또렷이 있었다. 시무룩해있는 옆 친구들의 입장은 생각지 않고 “합격이다! 합격!”기쁨에 벅차 히딩크 감독의 몸짓으로 소리소리 질렀다. 내가 일찍이 어떤 시험에도 그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관심 가지고 좋아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합격의 기쁨은 잠간뿐, 이내 다시 걱정거리가 생겼다. 공식적 문서상의 신원조회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신입생들에 대한 신원조사는 워낙 엄격하여 특무부대요원을 비밀리에 집적 파견하여 철저히 파악 확인 한다는데 살얼음 걷듯 조심스레 기다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드디어 낯 선 사람 한 분이 마을에 나타나 힐끔힐끔 우리 집을 담 넘어 기웃거리다가 나의 셋째 삼촌과 마주쳤다. 아마 탐문해본 결과 나에 대한 평판이 워낙 좋은데다가 마을에서 가장 큰 기와지붕의 우리 집을 보니 안심이 되었던 것 같다. 당시 삼촌께서 광주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입대하여 헌병 중사로 근무하다가 갓 제대하여 집에 머물고 있었다. 그를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여 소주 한잔을 하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논산 훈련소 입대 동기였다. 조상님들과 신의 도우심이 컸던지 모든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려 나갔다.


필기시험 합격자들은 마지막으로 사관학교에 모여 체력검정 과 면접시험을 치렀다. 나는 100미터 달리기를 제한시간인 16초에 들어와 겨우 턱걸이했기 때문에 실망이 컸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2000미터 달리기에서는 운동장에서 쓸어져 죽든지 1등을 하던지 하겠다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뛰었다. 내가 얼마나 빨리 달렸던지 2등과는 한바퀴 이상의 격차를 내며 최우수 기록을 세웠다. 면접고사 시간에는 생도대장 고 최주종 장군이 맨 마지막에 앉아 있었는데 낮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고개를 끄떡끄떡 위아래로 훑어보는 호의적 표정이 “너는 합격이다”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집에 내려와 아무리 기다려도 정식 합격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초조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필경 아버님 일 때문에 합격이 취소된 것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참다못해 가정교사를 하며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다니고 있던 동기생 김만두씨에게 육사에 직접 가서 합격 여부를 확인 해 달라고 부탁하였더니 며칠 후 급한 연락이 왔다. 럭비 선수로 발탁되었으니 즉시 올라와 가입교하라는 것이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부랴부랴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와 사관학교 교무과로 갔다. “자네 육상 선수인가? 스파이크 가져왔는가?”하더니 나의 2천 미터 기록이 너무 뛰어나 럭비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으니 미리 가입교하여 운동연습을 하라고 했다. 당시 사관학교에서는 3군 사관학교 체육대회를 매우 중요시하여 럭비와 축구 선수들은 별도로 생활하며 맹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나는 스파이크가 무엇인지도 모르거니와 2000미터를 잘 뛰었던 것은 순전히 악으로 한 것에 불과하고 운동감각이 너무 둔하고 소질이 없어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 장교는 여러 가지를 묻더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지 그러면 일단 내려가서 일반생도들과 함께 입교하라 했다. 나는“급히 올라오라 해놓고 이렇게 싱겁게 그냥 가라고 하느냐?”고 항의했다가 “요놈, 아직 입교도 하지 않은 놈이 불평이 많다.”는 한마디에 질겁해서 :걸음아 나살려라" 도망치듯 교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완도로 내려갔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고 그리던 육군사관학교 최종 합격 통보서를 받았다. 눈물나도록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내 인생의 어둡고 괴로웠던 암흑의 긴 터널을 다 지나 이제 환한 희망의 길만 열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 세상을 다 차지한 것 같았다.


면장님 지서장님 등 유지들이 할아버지께 축하 인사드리러 찾아왔다. 축하의 농악 잔치가 벌어졌고 온 동리가 떠들썩한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할아버지께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평생 근엄하신 모습을 흩트리지 않으셨던 어머님께서도 이날만은 고개를 숙이신 체 춤을 추셨다. 내 동생들은 음식 심부름하느라 분주했다.


입교 출발 전 날까지 식사 대접받느라 이집 저집 다니며 구름 위에 두둥실 떠있듯 황홀한 날들을 정신없이 보내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칭찬이요 격려요 부러움이었다. 인생 역전 성공 드라마의 산 주인공이라도 되듯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젊은이들이 좋아했다.


잠간사이 칠순이 된 지금까지 나는 그 분들에게 아무 대접도 하지 못했음을 통절히 후회한다. 그러나 나라와 겨레를 위한 마지막 사업인 이 평화재향군인회를 잘되게 함이 그들에 대한 보답 아니겠느냐?  늘 하던 변명을 또 다시 되풀이한다.

















2. 목이터져라 외친 "예! 1686번 표명렬 생도" <군개혁에 바친 내인생>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마지막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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