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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삼청교육대에서 만난 그 사람 무사했을까? <군대개혁에 바친 내인생>

2008-01-20 17:06:47, Hit : 5661

작성자 : 표명렬
강원도 현리에서 귀양살이 하던 시절에는 이래저래 눈물 흘린 날도 많았다. “사나이가 무슨 놈의 눈물이 그렇게도 많으냐?” 자주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 잘 고쳐지지 않았다.

내 일생 너무나 평탄치 못한 시련의 가시밭을 헤치며 걸어와서 그런지 고난의 어려움이 닥칠 때는 오히려 마음의 무장이 단단해져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 의분을 참지 못해 흐르는 눈물은 소리 없이 흐느껴지고 감동이 북 바쳐 오를 때는 엉엉 소리 내 울기도 한다.


어머님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눈물이 고이고 흐른다. 오늘 아침에도 오마이뉴스 ‘사는 이야기’의 내 글“장군이 다 뭐다냐? 광주에서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었는디!”를 읽다가 그만 울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이 불효막급 보잘것없는 아들을 하늘만큼이나 끔찍이 여기시며 평생을 사셨던 어머님 생각이 폭발하여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눈물을 많이 흘리고 나면 기분이 좋다. 비가 온 뒤에 산천이 깨끗해지듯이 마음이 한결 가볍고 맑아짐을 느낄 수 있다.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에는 세상만사가, 모든 사람들이 다 불쌍하고 슬프게만 느껴져 조그마한 자극에도 소리 내어 우는 때가 많았다. 결혼 초  아내는 나의 이 나쁜 술버릇 때문에 “저런 분하고 일평생을 어떻게 살까?” 너무 놀라 가슴이 철거덕 내려안더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은 술 못 마시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험난한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 땅에는 억울하고 슬픈, 참으로 참담한 일들을 당하면서도 죽지 못해 할 수 없이 살아온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나는 그들에게 큰 빚을 지며 살고 있다고 늘 생각해왔다. 막연하지만, 그분들을 위해 내가 무엇인가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막상 그런 사람들과 맞다드렸을 때 그런 상항에 처하였을 때, 나의 힘은 너무 허약하고 너무나 용기 없는 비겁자일 수밖에 없었다.


군단 관할 지역 내에는 삼청교육대가 두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정훈 참모인 나는 그들에게 정신 교육 특강을 하도록 계획되어 있어서 자주 다녀왔다. 꼬불꼬불 흔들리는 비포장 길을 지나 그곳에 다 달으면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포로수용소보다 더 의시시한 완전 딴 세상이 만들어져 있었다. 인적이라곤 전혀 없이 사방이 산으로 둘러 쌓여있어 하늘만 보이는 이 곳에 끌려온 사람들의 몰골은 가지각색 이었다. 대체로 얼굴이 깡말라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체구가  왜소해 보였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가장 불행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쓸어 모아다 놓은 전시장 같았다. 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먹지 못해서 그런지  대체로 키들이 작았다. 가난에 쪼들리고 세파에 너무나 시달리며 구박받으면서 자라온 우리나라 천덕꾸러기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들의 전체 집합소가 거기 있었다.


정권이 무엇이 길래 그것을 잡기위해 무고한 광주시민을 학살한 주동자들이 어떤 짓인들 못하랴마는 소위 민주국가의 문명사회에서는 어떤 이유와 명분으로도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천인공노할 살인적 만행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백색 아리안 족이 유태인을 학살할 때의 광기와 살기를 우리의 산하 내 눈앞에서 보는 듯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혼이 나가버린 로봇처럼 조교들의 악다구니에 일사불란 절대 순응 했다. 인간 도살장과 같은 지옥의 분위기에 매몰되어 기계처럼 움직였다.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으며 노예보다 더 극심한 강제 노역을 견디면서 끊임없는 폭력의 공포 속에 놓여 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넘는 무지막지한 노동을 강요당하여 채찍과 몽둥이의 휘두름에 무저항으로 얻어맞고 걷어차는 군화 발질에 얻어터져 피멍이 맺히고 있었다. 완전 짐승취급을 했다. 아니 짐승이라도 당장 죽이지 않을 바에는 그렇게까지 무지막지 개 패듯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목도한 우리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는 양심의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가느다란 고동소리 일뿐 나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목사님도 법사님도 신부님도 “저들이야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요!”하며 말리거나 정면 항의하지 못하고 남 듣지 않은 곳에서 한숨만 푹 푹 쉬어 묵시적 동의의 공범자가 되어있었다. 조직화된 무자비 거대폭력 앞에 우리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아니 그보다 나 자신 너무나 비굴했다. 그들은 3군단으로 밀려오게 만든 것 하나만으로도 나의 입을 조용히 닫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계란으로 바위치기인데--뭐! 더 큰 일을 위하여 참노라”고 자작의 궁색한 변명으로 위안받고 있었다.


눈치만 살피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불안에 떨고 있는 가엾기 그지없던 그들의 표정이 오래도록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통성 없는 쿠데타 정부가 많이 가져 잘사는 기득권자들로부터 “속 시원히 잘 한다--“ 말을 듣겠다고 박정희가 하던 그대로 본받아 힘없고 불행한 사람들이 사회정의를 흩트리는 사회악이라며 철퇴를 가한 조치이니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가? 대한민국에는 배고프고 배경 없는 못난이들은 다 쓸어버리고 잘난 사람들끼리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짓인가?


그들 중에는 성경구절을 줄줄 암송하고 찬송가도 큰소리로 잘 부르며 너무나 자연스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감정을 넣어 막힘없이 기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내가 강의를 하기 위해 천막 안으로 들어서면 천막이 찢어지고 날아가 버릴 듯이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목이 터져라 우렁차게 찬송가를 불러댔다. “당신은 우리들의 속사정을 알 것 아니요! 제발 좀 도와주시요!”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내가 무슨 말로 산전수전 다 겪고 막다른 여기까지 온 그들에게 정신교육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신앙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나의 경험이나 말이 아닌, 성경에 써 있는 구절을 가지고 생각하도록 유도했다. 나의 강의 내용에 대해 보안대 등에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는 나름대로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들은 나를 설교하러 온 목사로 착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고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있었던지 억울하게 잡혀왔음을 호소하는 내용을 깨알만한 글씨로 쪽지에 적어 남이 볼세라 번개처럼 내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 전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렵 마침 전방 2사단 사령부 지역에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 주관하여 신문사 간부 및 기자들이 대거 최전방견학 방문이 있었다. 칵테일 시간에 나는 당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한 유명 기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힘들게 삼청교육대의 문제점에 대하여 넌지시 말을 던졌다. 내 호주머니에 넣어준 억울하게 끌려온 분의 하소연을 건네주려고 참으로 어려운 서론을 꺼낸 건데 너무나 무안했다. 그가 내 얼굴을 힐끔 한번 쳐다보더니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우다가 이내 다른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버리지 않는가!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틀림없이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여 벼르고 벼렸는데 나의 예상은 완전 빗나가 버렸다.


나는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사회에 그토록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름 있는 기자라는 자가 정의를 밝혀야할 기자정신은 묻어버리고 저렇게 현실 타협에 영악하다니 통탄할 일이었다. 물론 민주화를 위해 정의의 편에 서서 온갖 핍박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지조를 지켜온 훌륭한 언론인들도 많았지만 그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많은 언론인들이 양심을 뒤로하고 말장난으로 독재 정권을 비호하며 권력이 주는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광주학살에 대해서 누군가가 바른 필치를 날려 주리라 생각하며 기자들에 대해 뭔가를 기대했던 내가 세상을 너무 모른 잘 못이었다.


그런 양심을 팔아먹는 기자들의 붓놀림으로 국가반란 일당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해줌으로서 역적도당들의 반역을 성공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생각하니 그 자리에서 그냥 한데 갈기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공보장교 중에도 주로 이들과 “형님! 동생!”어울려 다니면서 그들의 군 관계 부탁을 잘 해결하는 뒷바라지로 환심을 사고 지휘관으로부터는 판공비를 잘 뜯어내어 기자들에게 촌지 분배를 잘하는 그런 자가 유능한 공보장교로 평가받기도 했던 그런 암흑의 시대였다.


나를 피해버린 그 기자와 다른 기자들의 주고받는 대화의 주제가 음담패설에 머물고 있음을  들으면서 나라의 장래가 참으로 암담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세상이 깡패들의 천하 이대로 굳혀져 버리고 말겠구나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나 혼자 세상을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야 말들을 안 하고 있을 뿐이지---.


울적한 마음을 달래느라 그 날은 따라주는 대로 사양 없이 연거푸 술을 마시고 또 마셨다. 돌아오는 길에는 절망의 설움에 북받쳐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목이매여 노래를 불렀다. 원통 쪽으로 넘어오는 좁은 비포장도로에서는 차가 심하게 덜커덕거렸지만, 나는 그냥 계속해서 울밑에선 봉선화도 부르고 ‘사나이 가는 길 앞에 눈물만 있을 소냐--’도 반복해서 불렀다. 내 사랑하는 딸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부르던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눈 사이 응달에 외로이 서서, 아무도 찾지 않은 추운 겨울을 바람 따라 휘파람만 불고 있구나!”를 되풀이 불렀다.


세상은 이미 광주학살의 피위에 세워진 불의 막급한 권력의 편에 완전 기울러져 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정의를 말 해주어야할 기자들이란 자들까지도 그렇게, 안일한 불의의 흐름에 앞서 휩쓸러 가고 있으니 추운 겨울 귀양살이의 내 신세가 꼭 이런 노래 말의 주인공인 것만 같다는 슬픈 생각 때문에 울고 또 울며 불렀다.


나 자신도 삼청교육대에 끌려와있는 사람들하고 다를 바 없이 똑같은 신세라는 생각과 함께 불안에 쫓기며 공포에  떨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자꾸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나를 믿고 기대하며 쪽지 편지를 전해주었던 그 분은 얼마나 실망했을까? 무사히 그 지옥의 터널 속을 헤치고 나왔을까?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18.민간인을 쐈는데 훈장 상신이라니? <군대개혁에 바친 내 일생<
16 . 현대판 귀양살이 떠나다. <군대개혁에 바친 내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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