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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피묻은 군복을 끌어 안고 있는 아내<군애개혁에 바친 내인생>

2008-01-21 18:23:01, Hit : 4816

작성자 : 표명렬
 1984년 12월 24일 오후, 나는 누나의 큰 아들인 조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손수 운전하여 대구를 출발 88고속도로를 타고 광주로 달렸다. 모처럼 아내와 아들 딸 전 가족이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여행을 하니 즐겁고 행복했다. 그때만 해도 자가용 자동차가 흔하지 않았다. 애들 보는데서 운전 실력도 뽐낼 겸 콧노래를 부르며 신나게 차를 몰았다.

그늘진 곳에는 아직 눈이 덮여있었고 내리는 눈 위에 차들이 지나가 시멘트로 포장된 도로 위는 빤질빤질한 곳이 많았다. 눈발은 계속해서 날리고 있었다. 다른 차들은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눈길 운전이 위험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는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또 내 차는 미끄러운 눈길에도 염려할 것 없는 세계적 명품이라고 선전하던 XXX 새 타이어로 4개 모두 갈아 끼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다른 차들을 뒤로 재끼고 신나게 달려 약간 경사진 길을 한참 오르면서 길을 따라 오른 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그러나 아뿔싸 바퀴의 방향만 오른 쪽으로 돌려졌을 뿐 차는 그냥  오던 관성대로 미끄러져 직진으로 나아갔다. 중앙선을 넘어 도로 완 쪽에 있는 알루미늄 가드레일을 탁! 치더니 붕 떠서 언덕 밑으로 구르기 시작했다. 차가 도로를 벗어나 가드레일을 무너뜨리고 넘어질 때 아내는 이미 “이렇게 죽는구나!”하며 정신을 잃어 버렸었다고 한다. 나는 그래도 월남 참전용사의 기를 살려 “꽉 잡아라! 꼭 잡아! ” 연속 소리를 질렀다. 차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뒤집혀 지더니 한 바퀴 두 바퀴 아래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강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지? 절벽 밑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일이었다.---우리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애들도 쥐죽은 듯 아무 기척이 없었다. 나 같은 것을 부모라고--그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속절없이 가는 인생인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무엇이 그렇게 절대 선이고 악인 양 그토록 악을 쓰며 버둥대며 살았구나! 하는 허무한 생각과 한스러운 일들이 차 구르는 소리만의 적막 가운데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무엇보다 고생고생만 시키면서도 늘 큰 소리 야단만 뻥뻥 쳐온 사랑하는 내 아내와 아들 정훈이 딸 재원이 에게 너무너무 미안했다.


아주  빠르게 굴러가지 않고 갈수록 둔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구르는 것이 큰 낭떠러지는 아닌 듯싶었다. 여섯 번을 굴러가다가 들썩들썩 구를까말까 하더니 더 이상 구르지 않고 멈췄다. “가만히 그대로들 있어라!” 소리소리 지르며 내가 맨 먼저 나온 다음 하나 둘 다 찌그러진 차체 안에서 애들을 꺼냈다. 아들놈은 얼굴에 큰 상처를 입어 유혈이 낭자하였다. 딸아이는 손등 얼굴 등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아내는 창백한 얼굴에 한참만에야 정신이 돌아와 맨 나중에 나왔다. 피투성이 되어있는 우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제 곧 다 죽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자신도 이로 인해 일평생 고개가 아픈 상태다.


정신을 차린 다음 비탈길을 미끄러졌다 일어섰다하며 엉금엉금 기어 올라갔다. 경사가 심한데다가 마른 풀 위에 눈이 쌓여있어 계속 미끄러지면서 가까스로 고속도로가 길 위까지 올라갔다. 아내는 급경사를 올라오지 못하고 계속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졌다. 내려다보니, 내 군복과 모자를 양팔로 안고 오느라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 고생고생 하고 있었다. “그 까짓 군복 내버리고 와! 뭐 그리 보물단지라고 !”하며 버럭 화내어 소리를 질렀지만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는 군인의 길 하나밖에 없는 냥 날마다 악써 날뛰며 살아왔던 나의 모습이 아내를 저렇게 만들었구나!  내가 오죽 심하게 굴렀으면 이 상황에서 그놈의 군복이 무엇이 길래? 저렇게 가져와야만 하는가?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 그지없어 눈물을 흘렸다.


아내는 다 죽어가는 힘없는 목소리로 피 묻은 군복이지만 계급장과 내 이름이 거기 붙어 있으니, 참아 버려두고 올 수 없더라는 것이다. 


아들은 전남 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 얼굴을 수십 바늘 꾀 맺다. 그 후 성형수술해주기 전까지는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잘 들지 않았다. 그는 지금도 자가용차를 갖지 않고 있다. 아예 운전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이후 세상에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새로워질 것을 굳게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그 때 뿐이고 얼마가지 않아 또 옛날과 다름없이 그대로계속 성질 급하게 화내며 부끄러운 생각과 모습 그대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부끄러움뿐인 정훈


이런 죽음을 넘는 과정을 거친 6개월여 후 드디어 난 병과의 최고 수장인 정훈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정훈으로 온 다음에는 주로 육군본부에서 정신전력 강화 연구에 몰두했다. 사단참모 경력이 있기는 해도 청와대와 육본에 파견 나와 정신전력 이론체계를 세우고 정신전력학교를 만드는 등 거의 서울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정훈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면 부끄러움뿐이다. 유신이 선포되었을 시 그 길만이 살길이라고 열을 올려 박정희 우상화에 앞장섰다. 전 태일 노동 열사가 호소할 길 없는 가련한 근로자들을 위해 몸을 불살랐을 때 우리는 이 나라 노동계는 빨갱이들의 천국이 되어가고 있다며 목에 핏줄을 세웠다. 청년 학생들이 민주화를 위하여 정의의 횃불 들어 피를 흘리고 있을 때 “빨갱이들의 조종을 받고 있는 철부지 한 것들”이라며 대학생 병영훈련의 정신교육을 강화한다고 우국충정(?)에 불타있었다. 광주시민들의 민주화를 위한 처절한 투쟁을 간첩의 조종을 받고 있는 폭도들이라고 매도하며 제 5공화국의 탄생을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선거 때마다 독재정당에게 몰표가 나오게 하기 위해 ‘시국관 확립’이라는 제목의 안기부에서 내려준 교재를 가지고 보안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앵무새처럼 떠들며 순회교육을 다녔다. 완전 거짓으로 조작된 ‘김대중 그는 누구인가?’를 전 장병, 전 군인 가족에게 완전한 진실인양 30년 가까이  끊임없이 강조해 오는데 앞장섰다.


이러다보니 정훈병과 출신 예비역 간부들 거의가 아직도 냉전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몇 년 전 나는 그들로부터 제명당했다. 이라크 파병반대, 국가보안법 폐지, 대북 적대의식 교육중단 주장 등이 정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나의 과거를 그들이 깨끗이 씻어 주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22. "니 당장 보따리 싸!" <군대 개혁에 바친 내 인생>
20.기회는 항상 있다. 놓치고 있을 뿐이다.<군대개혁에 바친 내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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