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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윗사람 잘못 만나면 대령도 지옥같은 군대생활인데 병사들이야<군대개혁에 바친 내일생>

2008-01-21 18:15:22, Hit : 4843

작성자 : 표명렬

내가 제2군사령부에서 정훈 참모로 근무하는 동안 군사령관이 네 사람이나 바뀌었다. 처음 부임했을 때의 차규헌 사령관은 간부 교육에 대해서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영관 장교 이상의 고급간부들은 매일 점심시간이 끝나면 그 자리에 앉아서 10분 교육을 받도록 되어있었다. 사령관도 끝까지 강의를 듣고 앉아있으니 간부들은 꼼짝할 수 없어 교육 참여율이 아주 높았다.


그전까지는 동기생 황원탁 대령(후에 소장진급. 국민의정부시 주독일대사, 청와대 안보특보 역임)이 영어회화 교육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전입해 오자 10분 정신교육으로 바꿔 내가 맡게 되었다.


처음 강의를 시작했을 때는 너무 긴장하여 분필 가루가 노상 옷에 묻어 있었고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허둥댔다. 하루하루가 부담스러운데 주위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정훈 참모니까 당연히 잘 하는 것 아니냐고들 했다. 그러나 매일 밤낮으로 남모르는 노력의 고통이 있었다. 실수 없이 잘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나는 소화불량증에 늘 걸려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다.


대개 일주일 분의 제목을 정한 다음에 그 제목에서 말하고자하는 내용의 핵심을 생각날 때마다 요약 기록해 두었다가 강의 시작 이틀 전까지는 내용을 확정하여 연습을 했다. 관사에서 사무실까지 출근길에 걸어가면서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드릴 말씀의 제목은 ‘000‘입니다.---” 이렇게 중얼중얼 연습을 하고 나면 한결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가장 인상적이었던 강의는 ’적자존(適者存)‘이라는 제목의 내용이다. 당시 육군 본부에 가 보면 강당의 넓은 회색 외벽 높은 곳에 균형 잡히지 않은 너무 큰 한문 글씨로 强者存(강자존)이라고 써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겁을 주며 기분을 상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 구호를 만들어 강조하던 황영시 참모총장은 군단장 시절 12. 12 군사반란에 적극 가담했던 분으로 엘리트 예찬의 논리로서 자신의 반란 동참 행위를 정당화 변명하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육본을 출입하는 간부들이 말은 할 수 없었지만, 그 멋없이 큰 글씨의 구호가 4년제 육사출신 하나회가 중심된 신 군부세력에게 아부 하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육본 건물에 써있는 그 구호가 참으로 못 마땅하지만 정면으로 반박할 수는 없었고, 나는 그들이 말하는 것과는 반대의 입장인 적자생존(適者生存)이라는 제목의 ‘10분 정신교육’을 함으로써 마음속에 품고 있는 불쾌함을 해소하고자 했다. 그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아예 제목까지 같은 세 글자인 ‘적자존(適者存)’으로 했다.


“세상에는 물리적인 힘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정글의 법칙에서도 결코 그렇지가 않다. 맹수들은 배가 고프지 않으면 약한 다른 짐승들을 마구 잡아먹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먹이사슬의 관계에 불균형이 발생하게 되고, 생태계의 생존 질서가 파괴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자리에서 호령하던 공룡은 멸종되고 말았다.


진정한 힘은 자연과 환경과 다른 개체와의 조화와 적응 능력에서 나온다. 이것은 동물세계의 질서만이 아니다. 인간 세계의 사회생활 법칙에도 적용된다. 진정으로 강한 힘은 지배력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끌고 사로잡을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기에 이타적인 ‘사랑’의 힘이 가장 강한 힘이라 하지 않은가? 힘센 자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적자생존의 우격다짐 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는가.


하나의 강자가 만들어져 남기까지는 수많은 이름모를 약자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겸허함이 있어야할 것이다. 강한 강철은 부러지기 쉽다. 물리적인 폭력은 언젠가는 반드시 그 보다 강한 폭력에 의해서 멸망된다. 이는 역사의 법칙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점심을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듯 후닥닥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군 사령관께서 나를 찾는다는 비서실장의 전갈이 왔다. 자주 있는 일이라 별 부담 없이 사령관실로 올라갔다. 차 사령관은 찬바람이 감돌 정도로 엄격하여 사람들이 꺼려했지만, 내 강의에 대해서는 늘 나를 불러“오늘 그 말이 맞아!”하며  칭찬해 주었다 그러면 나는 신바람이 나서 10분 정신교육 시간에 다 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열을 뿜어 말하느라 차도 마시지 않고 돌아올 때가 많았다. 의식개혁, 


과묵하여 주로 듣기만 하던 사령관께서는 나의 당돌하고 꾸밈없는 주장과 설명에 대해 신선 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 날은 흥분을 감추지 않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과분한 칭찬을 해 주었다. 나는 날마다 더욱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자신 있게 강의를 했다. 그 후 강의내용을 모아 간부의 도(幹部의 道)라는 제명의 소책자를 만들어 군사령부 예하 전 영관급 간부들이 읽도록 했다.


세 번째 맞은 군사령관은 왜 그랬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작심한 듯 내놓고 나를 미워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겁 없는 발언으로 인해 내가 3군단으로 쫓겨 갈 때, 인사 운영감을 했던 분이다.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당신이 동해안 방위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는 인사비밀을 고해바쳐 정승화 장군을 제거하고 하나회가 군을 장악한 12.12 반란을 성공하게 만들어 일약 출세 길에 오른 사람이라고들 했다.


나를 가까이 해서는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는 요주의 인물로 보아서 그랬는지 도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무조건 나를 싫어했다. 참모 회의 때마다, 아무 이유도 없이 “정훈참모 형편없는 놈!” 하며 모욕적으로 비난했다. 대령 계급을 달고 있는 참모에게 업무에 관계되는 질책도 아닌, 이렇게 모욕적인 인신공격을 퍼붓는 것은 아마 이 지구상의 어떤 군대에도 있을 수 없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잘못에 대한 구체적인 지적도 없이, 막연하게 그냥 “정훈참모! 일 똑바로 해!, 형편없는 놈! 나한테는 안 통해!”이런 식으로 마치 깡패두목처럼 막말로 인격적인 모욕의 이유 없는 핀잔을 주니 참으로 미칠 노릇이었다. 5공 세력 덕분에 너무나 빠르게 4성 장군이 되었기 때문에 미처 최고위 간부로서 갖추고 지녀야할 품위를 알지 못해서였는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디에 호소할 곳도 없이 무작정 참고 견딜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으니 복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군사령관의 나에 대한 태도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내 처지가 얼마나 딱해보였던지 한 번은 참모장 김운태 소장께서 나를 부르더니 “정훈참모! 내가 군대생활 하는 동안 많은 장교들을 봐왔지만 표대령 처럼 똑똑하고 열심이고 예의바르고 실력 있고 애국심 강한 장교를 본적이 없소. 이것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요! 진심이요! 전임 차 사령관님께서도 늘 그렇게 말씀하셨고 다른 장군참모들도 같은 생각이요! 그런데 새로 오신 사령관님은 왜 저러시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요! 아마 정훈감을 시키고자 하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기죽지 마시오! 나쁜 때가 있으면 또 좋은 때가 있는 법이요!”하며 위로해 주었다.


사실이지 나는 진정 정훈감이 되고 안 되고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대령 계급장 달고 국방부에서 조 중령이 근무하고 있던 3군단 참모 자리로 쫓겨 갈 때 이미 장군 진급 안 되도록 결정 났는데 무슨 미련이 있었겠는가? 군을 개혁해야한다는 일념뿐이었는데 그런 사령관의 참모로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것이 너무나 분하고 지겨웠었다.


고급 간부인 내 처지가 이러할 진데, 그렇지 않아도 숨 막히는 병영생활 분위기에서 상관마저 잘 못 만나면 병사들의 삶이란 그야말로 죽지 못해서 견디는 지옥살이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간부들을 퇴근이라도 있는데--. 더욱 분발하여 기필코 우리 군을 개혁해야겠다는 조바심을 금할 수 없었다.  


사령관으로부터 이유 없이 미움을 받아 욕만 먹으니 부대 내에 머물러 있기가 죽기보다 싫어졌다. 매일 17시 일과시간 종료 나팔소리가 나면 지긋지긋한 부대를 무작정 떠나고 싶었다.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로 외출 나왔다가 일요일에 다시 대구로 내려가곤 했다.


한번은 서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옆 자리에 앉아 있던 분이 중국어 성경을 들추고 있었다. 목사님께서 그 분을 연세대학교 교수라고 소개해주었다. 예배가 끝난 다음 중국어를 그렇게 잘하느냐? 고 물어봤더니 한문이니까 그냥 어림짐작으로 보고 있다고 했다. 그때 번뜻 “나는 크게 막힘없이 말하고 읽을 수 있는데--아하! 바로 이거로구나! 나를 중국선교사로 보내 쓰시려고 귀양살이 보내는 등 이런 고난을 주셨구나!”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그날 저녁 만촌동 관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나는 안내의 도움을 받아 대구 지역에 있는 화교 교회에 전화를 걸었다. 우선 중국 교회에 나가 교회사용 중국어를 익히고 중국어 성경을 구하고자 했다. 전화를 받는 사람이 무슨 용건이냐고 물었다. 나는 중국어를 어지간히 아는 사람인데 중국선교를 위해서 중국교회에 다닐 생각이라고 했더니 그분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공부를 하여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구비해야 하는데 그 첫 단계가 신학대학을 졸업해야 한다고 자세히 설명 해 주었다. 자기도 대구 신학교에 다니고 있는 화교인데, 4년제 대학 학력이 인정 된 야간부도 있는 학교라며 아주 자세히 안내해 주었다.


다음날 일과 끝을 알리는 하기식 나팔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대구 신학교로 달려갔다. 교무과장과 교장님께서 쾌히 승낙해 주셔서 다음날 소정의 절차를 마친 다음 나는 졸지에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신학생이 되었다.


신학교 공부는 대부분 성경을 진리로 하여 목회자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준비과정이었다. 2천년 전에 쓴 성경이기 때문에 당시의 사회상이나 문화와는 너무나 많이 변해왔을 터이니 쓴 사람의 본래 뜻과 의도를 그대로 살려 번역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히브리어 헬라어는 아무리 해도 따라가기 어려웠다. 내가 왜 예수를 믿는가? 어떻게 믿어야겠는가를 잘 설명해 주는 ‘교회론, 성령 론--등 ’조직신학‘ 과목이 제일 재미있었다. 교회 다닌 지도 얼마 되지 않는 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만 느껴졌다. 야간 반인 우리 급우들은 대부분 직장이 있는 분들이었고 나이 차도 매우 심했다. 그들은 거의가 성경 구절을 잘 암송하고 기도를 막힘없이 줄줄 쏟아내며 교회의 법도에 대해서는 모두 통달하여 목회자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내가 현역 대령이라는 점에 대해 그리고 중국 선교를 목적으로 공부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는지 교수님들은 나에게 각별한 관심으로 잘 대해주었다.


신학교 과정이 다 끝나고 2월 졸업식만 남긴 1984년 크리스마스 전 날 나의 온 가족이 몰살당할 번했던 88고속도로 상에서의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었고 그 이듬해 7월 4일 누구에게 물어봐도 절대 불가능하다고 하던 장군으로 진급이 되었다.


광주 사태로 인해 내 인생 길이 바뀌었던 5년간의 그 긴 귀양살이 생활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세상은 5공 독재의 틀로 완전히 정착되어있었다.


생각하면 그 군사령관이 부임하자마자 계속 나를 그토록 미워하는 충격이 없었다면 내가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염두 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의 인연이란 당시에는 괴롭고 쓰라린 악연이었다 하더라도 지나고 보면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리라.  그래도-- 아무리 용서하려 하지만, 내 속이 너무 좁아서인지 지금도 그분만은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다, 두 번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은 것을 어찌하랴! 


 





20.기회는 항상 있다. 놓치고 있을 뿐이다.<군대개혁에 바친 내일생>
18.민간인을 쐈는데 훈장 상신이라니? <군대개혁에 바친 내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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