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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불효 막급했던 젊은 날<군대개혁에 바친 내 인생>

2007-12-17 18:00:39, Hit : 5313

작성자 : 표명렬
 62년 봄 육사를 졸업 ‘소위’ 계급장을 단 후부터 우리는 술, 담배, 여자의 3금(禁)에서 완전히 해방되었고 아침저녁 점호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런 해방감을 잘 누리고 있다가도 ‘자유에서의 도피’처럼 문득 문득 쫓기듯 불안한 생각이 조수처럼 밀려올 때가 많았다.

광주 보병학교에서 초등군사반 교육을 받고 다시 내가 만약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월남전에 가지 않았다면 육체적으로 가장 힘든 경험이었을 화순 동복의 바위산을 타고 오르내리던 유격훈련 과정을 마쳤다.


가슴에 유격훈련 이수 배지를 달고 나니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어떤 어려움도 능히 해쳐나랄 수 있으리라는 마음자세로 경기도 현리에 위치한 제11사단수색중대 제1소대장 직에 임명 받아 찾아갔다.


어둑어둑한 저녁 시간, 퀴퀴한 사내들 냄새에 불빛이 침침한 소대 내무반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다. 다른 소대와 함께 사용하는 내무반이었는데 육사출신 소대장이 부임했다고 괜히 옆 소대 병사들까지 두리번두리번 긴장하는 모습이 역역했다.


저녁 점호 전의 자유시간이기는 했지만, 내가 일장연설을 하고 있는데 소대향도가 술을 잔뜩 마셔 몸을 좌우로 흔들며 태권도복을 입고 들어왔다. 나를 보더니 손바닥이 보이는 경례를 하며“소대장님! 태권 연습하고 피엑스에서 한잔 했습니다”한다. “하사관들은 말로 통하지 않아. 능글능글 귀관들의 머리꼭지에 앉아있다! 몽둥이가 최고야! 처음에 버릇을 잘 드려야해! 무조건 기를 죽여야 해!”하던 선배들의 이야기가 순간적으로 귓가를 때렸다.


나는 더 이상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다짜고짜 “야 향도! 나도 운동을 좋아하지만, 그래 소대장이 부임하는데 술 취해가지고 들어와!”하고는 그의 명치를 향해 정권을 날렸더니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나의 소대장 부임 첫 인사는 이렇게 조폭 두목처럼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주먹맛을 보여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나의 연설 요지는”군인은 군기 속에서 산다. 나는 군기를 확실히 잡을 것이다. 군기에 어긋나면 용서 없다”로 기억된다.


내가 주번 사관 완장을 두루는 날이면 얼마나 설치고 다녔으면 “밤이어서 남이 보지 않는다고 단추 하나라도 풀고 다닌다든지 군화 끈을 적당히 메고 걷다가 표 소위한테 걸리면 혼이 난다. 조심해야한다!”고 사단사령부 병사들 간에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군기를 잡느라 도둑고양이처럼 밤잠을 자지 않고 계속 사령부 직할중대 지역을 순찰하고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자유시간에도 나름의 군기를 지켜야한다. 식사군기. 면회군기, 오락군기. 휴식군기, 취침군기--- 등. 군기가 빠지면 군인이 아니다!”로만 우리는 배웠다. “군기!”는 병사들을 옴짝 달싹 못하게 얽어매라고  일본군대가 주고 간 오라줄 이었다. 그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있을 때, 사병들은 거의가 조선인 출신들이었다. 병사들이 혹 민족적 연대감이나 민족의식을 가지게 되지나 않을까가 하는 것이 일본군 간부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래서 군기를 잡는다며 정신 차릴 수 없이 옭아매어두고 들볶아댔다. 밥그릇 수에 의한 고참병이 횡포부리도록 용인된 감옥 안의 통제질서를 내무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도록 만들었다.


친일 앞잡이들은 일본 군 간부들의 눈 밖에 날까봐 두려워 눈치 보며 충성심을 보여주느라 더 혹독 잔인하게 우리 병사들을 닦달했다. 이런 자들이 조국 광복 후 우리 군을 완전 장악해버렸으니 우리 국군 병사들에게도 “군인은 군기가 생명이다!”라며 똑 같은 방법 그대로 겁주고 들볶아 괴롭혀왔다. 조국은 광복되었지만, 군대는 더 어두운 세상이 되었다. 고참병의 횡포가 끝이지 않았고 수많은 의문사를 낳게 하는 그런 의시시한 곳이 되었다.


그들은 군국주의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며 민족 반역의 친일 앞잡이 노릇하던 자신들의 추한 과거가 들추어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일본군 상전들이 하던 그대로 민족의식을 가질 수 없도록 민족혼을 죽이고 민족정기를 지우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간부들부터 철두철미 민족정신을 가질 수 없도록 세뇌교육 시켰다. 그래서 사관학교에서는 민족의식은 전혀 없고 나처럼 전투기술과 ‘군기’ 하나에만 미친 자들을 양산했다. 그런 나를 우리 사단에서는 매우 장래가 촉망되는 모범장교라 칭찬이 자자했다.


최근 전시 작전통제권을 두고 소위 군 고위직을 지냈다는 분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어떻게 교육받고 무슨 생각을 하며 성장했는지가 그대로 나타난다. 친일분자들과 군사독재 옹호 세력들로부터 교육받고 이들에 의해 진급되어 별을 달고 국방장관이 되고 한 그들이었기에 그들의 흉중에 민족의식 역사의식이 박혀있을 이 없다. 배운 것이라고는 강한 나라, 강한 권력, 강한 자에게 무조건 빌붙어 굴종하는 사대적인 노예적 근성을 전수 받아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대로 행해왔다. 사관학교 출신들 대부분이 민족적 자존심도 국가에 대한 진정한 충성심도 없는 집단 이기적 나 홀로 애국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 사단이 동부전선 원통지역으로 이동해 얼마 안 있다가 나는 중위로 진급되어 제9연대 작전장교로 자리를 옮겨 원통고개 길 넘어 천도리라는 곳에서 작계 5027의 우리 연대지역 부분인 ‘OP 1-27-63‘을 외우다시피하며 방어진지를 직접 확인 점검하는 등 불철주야 물불가리지 않고 열심히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 연대장작전주임 양민봉 대위는 일반장교 출신이었는데 자존심이 강하고 원칙에 철저한 자세가 꼿꼿한 분이었다. 그는 육사출신들을 별로 탐탁히 여기지 않는 편이었지만 나에게는 특별히 잘해 주었다. 연대 훈련시험(RCT) 준비 및 시행, 지휘소 연습(CPX) 시행 업무를 거의 나에게 일임 맡기다시피 해서 난 작전실무에 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의 브리핑은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분명히 꿰뚫었다. 사단 내의 20연대와 13연대 작전주임 모두 육사출신 이었지만, 사단 작전회의 시 발표를 보면 우리 작전주임이 제일이었다.


나는 작전장교 1년을 마치자 9연대 제1중대장에 임명되어 연대 수색중대와 함께 DMZ에 투입되었다. 내가 맡은 최전방 지역은 차량으로 보급이 불가능한 건봉산 바로 앞의 지피(GP)와 오소동 골짜기의 시피(CP)시피가 포함되어있어서 우리 사단에서 가장 험준한 지역이었다. 우리 중대 후방에 있는 16기 이중형 대위가 지휘하던 건봉산 중대에서 1개 소대를 배속 받아 240명이 넘는 증강된 1개 중대였다.


나는 일본군 출신들이 세뇌교육 시켜준 그대로 부하들이란 끊임없이 닦달하고 꾸지람을 해야만 임무를 철저히 수행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전방 지역을 순찰하기 위해 중대 정문을 나서면 전화 교환 병이 ‘호랑이 떳다!’하며 초소마다 전달하는 공포의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졸병들은 잘 대해 주면 기어오른다. 시간 여유를 주면 잡 생각을 하여 사고 내기 쉽다. 그저 정신 못 차리도록 바쁘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적인 동정을 베풀면 큰일 저지른다!”등에 세뇌되어 나는 인간미가 매 말라버린 기계 같은 사람이었다.


65년도 중대장 근무 9개월 째 되었을 즈음,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하고 있던 이기백 소령(육사11기. 후에 국방장관역임)이 자기가 파월 기갑연대 작전주임으로 내정되었는데 나를 보좌관으로 데리고 가고 싶으니 의향이 어떤지? 빨리 답을 달라는 연락이 왔다. 그가 우리사단 13연대 작전주임을 하고 있을시 나를 잘 보았던 것 같다.


군인은 언제든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전장에 나가 목숨 바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뿐이었고 특히 선배가 알아주니 무슨 일인들 못 하겠는가 라는 심정이었다. 또 이 기회에 아버님의 문제로 인한 짐을 벗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고 해서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나 당초 계획과 달리 그는 사이공 주월 사령부 정보참모부로 가 벼렸다. 원치 않으면 파월을 취소할 수 있다는 최종 면담이 있었는데 나는 그냥 참전키로 하여 기갑연대 11중대로 명령이 났다.


별들도 잠든 고요한 밤 불침번 순찰을 돌고 있는데 이따금 별똥별이 긴 줄을 그으며 살아질 때는 무슨 불길한 일의 예고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옆 건물 내무반에서 갑자기 큰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 병사가 “어머니! 나는 못 갑니다. 절대로 못 갑니다. 어머니!”하며 엉! 엉! 소리 내어 우는 것이다.


불연 듯 시골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내가 월남파병이 결정되었다는 부대장의 편지가 전해졌을 때, 집안은 온통 난리가 났다고 한다. 늘 근엄한 모습을 잃지 않으시던 할아버지께서도 종가 집 장손의 외아들인데, 뻔히 죽을지 아는 사지(死地)에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절부절 중심을 잃고 계셨다한다.


무조건 완도로 끌고 내려오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을 받고 어머님께서 부랴부랴 홍천까지 면회를 오셨다. 그토록 고우시고 인자하신 어머님 모습이 완전히 변해있었다. 눈이 움푹 들어가시고 넋이 완전히 나가신 분 같았다. 말씀 아닌 초췌하신 모습으로 나타나셨다.


정말이지 나는 너무나 불효막심한 놈이다. 어머님께서 나에게 간곡히 들려주신 설득 말씀은 “너는 우리 표씨 가문의 대를 이어 가야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종가 집 장손이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나라에 팔아버려 군인이 되었지만, 너는 가문에 대한 책임이 있다. 외아들이니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당시 내가 “어머니! 자식이란 외아들이건 아니건 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만약 내가 가서 죽어야할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가서 죽게 된다면 그 부모님의 심정은 어떠하겠습니까?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라 하더라는 것이다.


어머님은 아름다운 외모에 마음이 참으로 넓으신 여장부 같으신 분이었다. 나의 철부지한 그 대답을 대견하게 받아드리셔서 더 이상 외아들 논리는 꺼내시지 않으셨다. 나의 불효한 이 말 한마디를 어머님께서는 평생 가슴 속에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계시다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당신의 손자에게 들려주시며 ”너의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분이다“라고 하셨다 한다.


여의도에서 대대적인 환송행사가 있었다. 어머님께서 재차 올라 오셨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완전 무장한 군인들의 거대한 행렬과 환송 행사의 분위기에 압도 되셔서 아무 말도 못하시고 그냥 내려가셔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일년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마다 온 식구가  장독대 옆에 정한 수 떠놓고 선조님들이 도와주시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한번은 내가 전사했다는 유언비가 나돌았지만, 어머니께서는 “시체를 내가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는 헛소리다”라고 일축하시며 조상님들의 특별한 가호가 있어 무사히 돌아올 것임을 굳게 믿고 계셨다고 한다. 아버님께서는 날마다 한숨만 쉬고 계셨다고 한다. 세상에 나처럼 불효한자가 또 어디 있을까?  아침마다 부모님 영정을 바라보며 용서를 빈다.







12. 계란 한개 제대로 먹어보지 못했던 시절(군대개혁에 바친 내 인생)
10. 분재화 된 사고(思考) <군 개혁에 바친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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