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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기무사가 별것을 다 간섭하네요! 당신 소신껏 해요!"<군대개혁에 바친 내 인생>

2008-01-21 19:51:21, Hit : 4941

작성자 : 표명렬
  이승만 독재시절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다던 김창룡이라는 염라대왕 같은 분이 있었다. 일본 관동군의 헌병 하사관이었던 그는 우리 광복군과 독립군이 항일 독립 전쟁에서 몸 바쳐 피 흘려 싸우고 있을 때 독립투사들을 고문 색출 체포 처형하게 만드는 데 핏발을 세워 날뛰던 살인 기술자였다.

광복 이후 마땅히 민족반역자로 처단되었어야할 그가 집권 야욕에만 눈이 어두워진 이승만의 필요에 의해 발탁되어 일제하에서 독립 운동가들을 상대로 숙달한 고문 살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멀쩡한 사람도 그에게 걸렸다하면 영락없이 빨갱이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항일 독립운동을 했거나 민족의 미래에 대해 관심가지고 걱정하는 분들은 그의 황천길 수첩 제1순위 인물로 올라있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한 열혈 장교의 총격으로 쓸어져 그가 저승에 갔다. 살아생전 얼마나 악명 높았으면 그때 당시에도 국리묘지에 들어가지 못한 그가 소위 문민정부 시절에 특무대의 후신인 기무사에 의해 국립묘지로 슬그머니 이장되었다.


아들을 고이 길러 군대에 보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그가 영내에서 자살을 했단다. 국군의 명에를 더럽혔다며 국립묘지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해 자식을 묻지도 못하며 울부짖고 있는 이 땅의 억울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은데 김창룡의 시신은 아주 쉽게 국립묘지에 들어갔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서‘역사바로세우기’를 한다고 요란을 떨며 일제(日帝)의 잔재(殘滓)를 없앤다고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중국 땅에 묻혀 있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국립묘지로 옮겨오던 그 무렵에 김창룡의 시신도 이장되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이었던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김창룡은 우리 국군이 지향하는 정신과 비전에 완전 역행하는 반역의 인물이다. 국군의 항일 무장투쟁과 정반대의 길에 서서 일본 천황에 충성을 맹세하여 광복군 독립군 타도에 혈안 되어 날뛰던 인물이다. 가장 악랄한 매국적 반민족 친일 분자중의 한사람인 그가 이승만의 심복이 되어 3성 장군까지 되었다는 사실은 세계어디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부끄럽고 희괴한 일이다. 무엇이건 그들 맘대로 할 수 있었던 독재정권 하에서 국립묘지에 안장했다면 기왕에 묻어진 것을 파내라 함은 민망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박정희를 비롯해 그토록 많은 묘지를 파 해치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나름대로 반면교사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장군이나 대통령이나 모두가 나라와 겨레를 위한 봉사자들이다. 죽어서도 사병은 반드시 화장하여 묻어야하고 조그마한 면적의 묘지 터 인데 장군의 묘지와 비석은 크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법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이승만 박정희는 대통령했다고 해서 아예 전제 군주시대의 임금 묘처럼 되어있다. 다른 묘와 구별 크게 만들려면 사설 묘지로 가거나 개인 기념관으로 옮겨야한다. 국립묘지가 평등의 민주적 가치를 교훈하는 산 교육장이 되도록 국립묘지 법 개혁하자.


김창룡의 묘는 소위 민주화되었다는 시대에 몰래 이장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금년 현충일엔 대전 국립묘지를 찾아가 참배를 하고 김창룡 묘지에 들려 묘지 파내기 퍼포먼스 등 의미 있는 행사에 땀 흘렸지만 안됐다는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를 지지하는 극우우리들도 확실히 기가 죽어있었다.


세상이 날로 변하여 거기 국립묘지에 둬봐야 갈수록 욕만 먹을 텐데 그의 주변사람들은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모르고 있는 듯 하여 참으로 딱했다. 그를 찬양 변명 감싸주던 사람들의 시대는 점점 사라지고 역사는 진실에 의해 그를 더 냉엄하게 평가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반드시 파 해쳐질 것이니 미리 옮기는 것이 고인은 물론 그 후손들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극우세력들의 시대착오적 우격다짐에 속지 말고 부끄러움을 알고 죽어서까지 욕먹을 짓을 피하는 현명한 길을 택하기를 마음속으로 비랬다. 역사는 설혹 조금 더디게 혹은 엉뚱한 길로 돌아서 가더라도 결국은 옳고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왔음을 알아야할 것이다.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않으면,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이며 잘 못된 길인지? 그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 를 생각하려들지 않는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극단적 경쟁의 이기적 욕망만 이글거리게 된다.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무자비함과 무책임이 난무하여 미래에 대한 꿈을 잃게 된다. 김창룡의 묘를 다른 곳으로 파가라고 우리가 목청 높이는 것은 바로 바람직한 역사교육의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조국광복이후 우리가 겪어온 수많은 크고 작은 수난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역할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우리는 한번도 정의의 바른 역사의식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정리 교훈하지 못했다.


광복 후 우리 군이 친일 세력들의 독무대가 되면서 우리 국군은 이들로부터 가장 심대한 악 영향의 피해를 받은 집단으로 성장해 왔다. 국군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정과 민족적 자부심이 충일한 조직이 되어야 하는데도 그들은 고의로 이와는 정 반대의 길로 군을 이끌고 길 드려 왔다.


나는 군대생활 하는 동안 한번도 우리 국군의 효시인 광복군과 독립군의 빛나는 활약상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다. 청산리, 봉오동전투의 장엄한 승리의 발자취에 대해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신흥무관학교가 우리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군을 나온 한참 후에야 알았다.


이에 대한 후회의 관점에서 김창용의 묘를 파내라고 여러 차례 신문에 기고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기고문을 작성하여 신문사에 보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기무사에서 집으로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후배인 해사출신 중령이라 했다. “선배님의 뜻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김창룡이 끼친 공로도 아주 많습니다.” 였다. 말이 먹혀들지 않자, 다시 대령이라는 분이 설득하려 했다. 그래도 무반응이자 기무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었다. “선배님 왜 그리 고집부리십니까?” 라는 식이었다. 어이가 없어 흥분된 어조로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곁에 있던 아내가 “기무사가 별것 다 간섭하네요! 당신 소신껏 해요!”라 했다.  한창 실랑이가 끝난 다음 “여보 당신,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는데 적당히 하라하지 무슨 배짱으로 소신껏 하라했소!” 했더니 “당신이 너무 불상해서요.”했다. 아무도 관심 없고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데 일평생 홀로 군 개혁하겠다고 시달리며 주장하니 안타깝고 가여워 아내인 나라도 힘을 보태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이 한마디에 힘을 얻어 그대로 신문에 냈다.


이제 7순도 지났으니 늘 조용히 살자고 졸라온 아내의 소원을 언제쯤에나 응해줄 수 있을지? 그러나 아직은 6.25전후 민간인 학살 지 탐방도 가야하고 바쁘다.




41,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대적관 교육 <군대개혁에 바친 내인생>
39. 부사관 가족의 핏눈물을 아는가?<군개혁에 바친 내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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