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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부사관 가족의 핏눈물을 아는가?<군개혁에 바친 내인생>

2008-01-21 19:49:25, Hit : 5306

작성자 : 표명렬
 '하사관'을 '부사관' 이라 명칭 바꾼다고 어디 해결될 일인가?

과거 우리 군의 하사관에 대한 인식은 너무나 잘못되어있었다. ‘소위’보다 계급이 낮다는 점만 강조하여 그들의 자존심을 짓밟고 뭉개는 일이 허다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하사관 단을 없애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할 정도로 버림받은 존재처럼 무시 괄시 당했다.


지금은 나아졌겠지만, 내가 사관학교를 졸업할 당시 선배들은 “군대는 계급이다” 라며 “하사관은 능구렁이들이니 처음에 기선을 제압 닦달해야 한다.” 했다. 부임하자마자 나는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소대원들이 보는 앞에서 향도에게 무자비 펀치를 날린 적이 있다.


군의 구성원은 장교단과 하사관 단 그리고 병들로 3대별된다. 우리 인체도 머리부분, 몸통부분, 손발다리 부분으로 구별되어있어 서로의 역할을 침범치 않고 임무를 수행한다. 군 조직에서 하사관 단은 몸통이나 다름없다. 장교들이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영역의 역할과 임무가 있다. 


각개전투훈련과 제식훈련 그리고 경계임무 및 전장군기와 내무생활, 보안의 생활화 등 장교들이 왈가왈부 따를 수 없는 숙달된 기능과 지도력을 겸비하고 있음이 하사관단의 특징이요 자랑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유전문 성을 존중 인정하여 육성치 않고 장교들이 월권 간섭 이 심하여 하사관단의 사기는 극도로 저하되고 찬밥신세가 되어옴이 그간의 실정이다. 늘 수준이 어떻고 책임감이 어떻고 불신하며 믿고 맡김으로서 책임 있게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지 않아 있으나마나 한 존재처럼 되었다.


이에 예비역 하사관들이 주동이 되어 명칭을 ‘부 사관’으로 바꿈으로서 하사관에 대한 인식을 쇄신코자 했다. 그러나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이는 호칭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간부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아무리 그럴듯한 명칭을 갖다 부친다 해도 매마찬가지 소용없는 일이다.


흔히 군대를 계급 사회라 한다. 어디 군대뿐이겠는가? 모든 조직은 그 목표달성을 위해 구성원 간에 권한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 부여된 계급적 위계질서가 있다. 조직의 특성상 군대가 보다 철두철미 엄격할 뿐이다.


군국주의 일본군대에서는 상급자에 대한 무조건 복종을 군인다움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복종을 습관화하여 길 드릴 수 있다고 전제하여 끊임없이 강요 세뇌 교육했다. 우리 군을 이끌어온 일본군 출신들이 똑같이 “군대란 --”하며 상관에 대한 절대 복종만을 귾임없이 강요 강조해왔다.


그러나 선진 민주주의 국가 군대는 그렇지 않다. 상관은 상관대로 하급자는 하급자대로 각자 책임 지워진 직무의 의무를 수행할 뿐이다. 그 범위와 내용은 법령과 규정으로 정해져있다. 따라서 상관에 대해 전인적인 인격이나 능력을 기대하지도 않는다. 각자 정해진 다른 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있다.


때문에 공무를 수행 중이 아닌 때의 인간관계에서는 높고 낮음의 계급의식이 없다. 하위계급이라 해서 위축될 이유가 없다. “군대는 계급사회다.”라는 말은 공무 중에 있을 때만 통하는 개념이다.


군인 가족끼리도 계급이 마치 봉건제 하의 신분인 것처럼, 인생의 우열을 결정하는 기준인 것처럼, 윗사람은 절대 오류가 없는 완전한 인격체인 것처럼 부 사관의 가족은 늘 자존심을 손상 받아 위축된 삶을 살아야하는 실정이었다.


우리회원 중에는 부친께서 지리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빨치산 대장 남태준을 생포했던 용감무쌍한 박 정용상사의 따님이 있다.


그는 기술이나 병참 관계부대에서 근무한적 없이 초지일관 전투부대에서만 복무하여 연대 주임상사 직에 올랐다. 박 여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멋있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군부대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한다.


그러나 점점 철이 들어가면서 아버님의 존재가 너무나 불쌍하고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한다. 계급 이란 게 뭔지 모르지만, 왜 우리 집의 기둥이신 하늘같은 나의 아버지가 새파랗게 젊은 장교들한테 반말을 들으며 쩔쩔매고 때때로 야단맞고 기압을 받아야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버님은 나라를 위해 목숨 까지 바쳐 전투도 많이 하신 애국자이신데 애송이들이 함부로 하는 것을 볼 때는 가슴에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한다.


어쩌다가 영관 계급장을 달고 있는 장교들을 보았을 때는 그들은 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별종의 우러러 봐야하는 특별한 존재들인 것으로 알았었다고 한다.


학교 갔다가 비가 오는 날이면 장교분의 아이는 지프차가 와서 실어 가는데 박 상사는 우의를 입고 비를 맞으며(군인은 우산을 쓰지 못하도록 규정되어있었음) 우산을 들고 와서 딸아이에게 주었다한다. 철몰랐던 소녀시절 박 여사는 찢어지게 가난하면서도 당당하던 아버지가 오히려 너무나 처량하고 창피했다고 한다.


박상사는 일생동안 고락을 함께하며 의지해왔던 부대에서 쫓겨나다시피 24년 6개월 만에 정년퇴직을 했다. 집한 칸 마련하지 못해 다른 곳으로 갈수도 없고 해서 그냥 부대 앞 살던 집에 눌러 앉아 살았다고 한다. 박상사는 아침 기상나팔이 불면 실성한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 부대 쪽을 향해 정좌하여 함께 점호를 하는 등 그의 마음은 한시도 부대를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부대 안에 내가 있어야하는데 왜 여기 있을까 의아히 생각하는 듯 늘 초조한 모습으로 담배를 연거 피우고 거의 날마다 술을 마셨다고한다.


그는 지나온 과거를 가끔 후회하며 몹시 취해있을 때는 무덤에 갈 때까지 숨겨가야 할 말을 털어 놓았다고 한다. 공비토벌 시 민간인 학살의 임무를 수행했던 일을 자책하다가 두려움에 쫓기듯 멈추곤 했다한다. 사실 말단에서 명령을 충실히 수행했던 분들은 철저히 이용만 당하고 이렇게 내팽개쳐지고 상급 장교들은 계속해서 진급 출세해 떵떵거리고 살아온 세월이었다 할 수 있다.


박 정용상사는 결국 부대 앞의 그 집에서 고단하고 천대받았지만 당당했던 일생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부대 근처에 묻어달라는 유언 따라 부대 곁에 있는 공동묘지에 찾아오는 이 별로 없이 쓸쓸히 장사를 지냈다.


박상사의 가족들에겐 허허벌판에 내몰리는 고난의 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여사는 어머님과 함께 어린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인생을 다 바쳤다. 고등학교 시절엔 며칠을 굶기도 했다.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일하고 절약하여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37세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어 지금은 서울에 빌딩도 하나 갖게 되었고 여행사를 차려 안락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드시 해결해야할 하나의 숙제가 남아있다. 아버님께서 지리산 공비토벌 시 빨치산 대장 남 태준을 생포하여 수여받은 화랑무공 훈장을 직접 보았는데 여기 저기 이사 다니다가 분실해버렸다. 실물이 없더라도 기록이 있으면 다시 교부받을 수 있으리라 여겨 국방부, 보훈처, 고충처리위원회 등을 쫓아다니며 백방으로 노력 호소했지만 허사였다. 동생들은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해서 아무 혜택도 없다는데 무얼 그렇게 찾으려하느냐 아버님께서 푸대접 받으며 고생하시던 옛날을 다시 떠올리기도 싫으니 제발 그만두라고 하지만 박 여사는 훈장을 꼭 찾아서 아버님 영전에 바치겠다는 집념을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사실은 훈장에 관한 기록은 물론이거니와 박 상사께서 공비토벌 시 소속되어있었던 부대에서 근무한 병적 기록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만약 장교에게서 이런 일이 있었더라도 이렇게 소홀히 취급하였을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박 여사의 노력이 허사되지 않으리라 믿으며 우리나라 부사관 제도가 정상적으로 자리 잡아 부사관과 그 가족들이 가슴을 펴고 떳떳이 살아가는 그런 날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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