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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사 훈육이 바뀌지 않으면 군개혁 없다. <개혁이 혁명보다어렵다 8회>

2007-10-31 09:41:32, Hit : 5966

작성자 : 표명렬
 



4. 역사의 길목 그리고 육사 개혁




만인 대 만인의 투쟁


나는 군대생활 하는 동안 일반장교 출신 상급자들로부터 “사관학교 출신 장교들이 머리는 좋은데, 타 장교들에 비해 더 이기적이고 경쟁에 너무 예민한 편이다. 그리고 대체로 너그럽지 못하고 정의감이 더 강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라는 평을 들은 적이 많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를 일이다. 전적으로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내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 볼 때 이런 평을 부정하기 어렵다.  말로는 “장차 국군의 큰 대들보가 될 사람들로서, 지녀야할 호연지기를 길러야한다. 정의를 생명같이 여겨야 한다”고들 했지만 그런 정신과 문화를 계발․발전시킬 수 있는 제도나 리더십 그리고 장교단의 문화가 거의 없었다.


자고 나면 선착순에 뒤지지 않으려 서로 밀치며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하고 교실에 들어가면 매일 그 날 배운 내용을 그 자리에서 시험 보는 속칭 쪽지시험에 어떤 문제가 나올까 하고 교관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매주 시험 성적 순위에 따라 교실의 반과 좌석 배치가 달라지니 여기에 신경을 써야하는 긴장감과 경쟁심의 연속으로서 그야말로 졸장부를 만들고 있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분위기는 졸업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각종 검열과 끊임없는 상급 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의 방문과 지적, 부대 훈련 시험의 서열, 보수 교육과정의 석차, 각종 사고에 대한 책임 추궁 등 숨막히는 경쟁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경쟁의 과정과 그 결과가 공정성을 신뢰하고 정정당당하게 대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때때로 비굴해야 하고 늘 초조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직업군인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진급제도가 육사 출신 간부들을 더욱 소심하게 만들어 왔다. 진급할 수 있는 공석을 ‘사관학교 몇 기생은 몇 명’ 이런 식으로 할당하여 그 중에서 선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동기생끼리 피나는 경쟁의 혈투(?)를 벌려야 했다. 진급 심사제도는 더욱 큰 문제였다. 바람직한 정신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근무 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히 발탁되는 그런 제도가 아니었다. 진급 여부를 결정하는 해가 되면 해당자들은 모든 것을 다 바쳐 그것을 위한 별도의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렇게 생도 시절에는 물론이거니와 간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도, 큰그릇과 기둥으로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인성 교육과 제도는 거의 없었다. 간부들 모두가 그냥 경쟁의 바다로 내던져진 상태나 다름없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관학교가 군을 이끌어 갈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본래의 역할은 하지 못하고 전투를 잘 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소대장을 양성 배출하였을 뿐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특히 졸업 후에는 각자 알아서 만인대 만인의 투쟁 속에서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열정, 민족의 미래에 대한 원대한 비전과 꿈, 정의를 실현하는 도덕적 용기와 역사의식 등을 심어주고 키워 주고자 하는 어떤 관심이나 노력도 없었다. 이런 정신적 풍토의 결과가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조심스럽게 민주주의 싹을 키워 가고 있던 장면 정권을 무력으로 탈취했던 5.16 군사 쿠데타를 성공하게 만든 역할을 비롯해서, 우리나라의 민주 발전을 저해했던 부끄러운 역사에 주역을 담당했던 불행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의(正義)인지 불의(不義)인지 그리고 민족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진행되지 못했으며, 육사 출신들 자신의 영달에 유․불리의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었다.


물론 생도 훈육의 비전과 이의 실현을 위한 목표나 시행방침 그리고 현재 추진 중에 있는 활동 내용 등이 브리핑 차트나 문서상에는 그럴듯하게 아주 잘 표현되고 갖추어져 있었다. 피상적으로만 보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사 출신 장교들이 현대사의 길목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고 어떤 영향을 미쳤던가에 대한 답은 이미 역사적 사실로 나와 있다.




5.16 쿠테타와 육사


되씹을수록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주던 사관생도의 신조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를 외칠 때마다 늘 나도 모르게 콧잔등이 시큰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숙연했다. 그렇지만 정의가 무엇이며 불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가까운 우리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본받아야할 정의로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혹은 그 반대의 사람들은 누구인지 등에 대해서 아무도 한마디의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기껏해야 “4년제 사관학교 출신들은 금전적 물질적 부조리와는 타협하지 않는 원칙 장교다” 정도였지만 그것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권력의 맛을 알고 난 후부터는 변질되어 일반 장교들보다 한술 더 뜬다고 여기게될 정도가 되었다. 우리가 생도 시절만 해도 선배들의 무용담(?)은 주로 초급 장교 시절, 식당에 들어가 병사들에게 밥을 정량대로 주는지를 저울질하여 확인하는 일, 보급창고 옆에 숨어 있다가 쌀을 훔쳐 가는 중대장을 잡아 혼을 내주는 일 등 주로 부패한 상관들을 고발하는 특별 임무를 수행하며 얽힌 이야기들이 많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수준의 것은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게 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4학년 재학 중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초기에는 미국 측의 강력한 반대로 인하여 그 성공이 매우 불안했다. 다급해진 주동 세력들은 생도들의 지지를 통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 소위 혁명군을 육사에 급히 보냈다. 생도 대장을 역임하면서 박학다식하고 강직하고 청렴결백하기로 많은 일화를 남겼던 박창암 대령이 가슴에 수류탄을 주렁주렁 달고 눈을 번득이며 나타나 카랑카랑한 그 특유의 목소리로 동참할 것을 열심히 호소했다. 그만큼 당시 4년제 육사에 대한 미국 측의 관심과 국민적 기대와 신뢰는 대단했었다.


그때 나는 제1대대장 생도 직을 맡고 있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언젠가는 우리가 주동이 되어 진정한 자기희생의 혁명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마음 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가슴을 펴며 살아왔는데, 그들이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진 입장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고 흡사 아끼고 아껴놓은 귀한 기회를 도둑 맞은 것 같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지지할 것인가, 반대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었다. 우리는 기왕 지휘체제가 와해되어버린 혁명 상황이니까 북극성 동창회(육사 동창회)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 그러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 밀려 현역 훈육관들은 점차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훈육관들이 소리를 지르며 집합을 명령했지만 우리 간부 생도들은 이에 응하지 않고 피해 버렸다.


엎치락뒤치락 실랑이 끝에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즈음 생도들은 단독 군장으로 식당 앞에 집합하였다. 생도대장 김익권 장군의 일장 연설이 끝난 다음 우리 생도들은 모두 가지고 있던 M-1소총을 회수 당하였다. 군인에게 있어 가장 큰 불명예인 무장해제 상태가 된 것이다. 그 날 저녁 중대장 생도 이상 우리 자치 간부 생도들은 명령 불복종의 이유로 불쾌한 냄새가 가득한 임시 유치장에 모두 감금되었다. 나는 그 유치장에서 제1중대장 생도 최창윤(총무처 장관 역임, 작고)생도와 퇴교 이후의 앞날에 대해서 이야기도 하며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밖에서 요란하게 떠드는 소리가 나더니 무슨 큰 은전이라도 베풀어 준 듯, 특별 석방되었다며 내보내 주었다.


기분은 매우 언짢았지만 우리는 5.16을 지지한다는 시가 행진을 했고 시청 앞에서 지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렇게 해서 육군사관학교는 우리나라 민주 발전사에 그리고 국군 발전사에 가장 치욕적인 기록으로 남을 5.16을 성공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것도 사실상 협박에 굴복하여 하는 수없이 나섰던 것이다. 강한 자 앞에는 무조건 손들고 항복함이 일신상의 안일을 위해 상책이라는 기회주의적인 사고를 생도 시절부터 우리는 이미 체득한 셈이다. 그 결과가 광주민중항쟁 과정에서의 무자비한 학살 등 우리 역사에 없었어야 할 부끄러운 흔적들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육사 생도들만 이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장군들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12.12 군사반란 때, 천하를 주름 잡으며 떵떵거리던 기라성들도 베레모를 쓴 공수단 하사관들이 들이닥쳐 총을 겨누면 거의가 목숨을 애원하듯 두 손을 버쩍 들고 항복했다. 한 사람도 목숨 걸고 대항하지 않았다. 불행히도 우리 군을 주도해온 지도 세력들은 거의가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정의의 편보다는 강자(强者) 쪽에 줄 선 사람들이다.


진정으로 정의로웠던 우리 군의 선배님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목숨을 바쳐왔건만 이승만 독재 정권을 뒷받침 해준 약삭빠른 반민족적 친일 세력들에 의해서 함몰되어 버렸다. 이들이 본격적으로 나라의 모든 영역을 석권해버린 5.16 이후에는 이런 현상이 더욱 노골화되어 대부분 고위직 장군들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독재자와 상관의 마음에 들게 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정의와 민족 같은 것은 안중에 없었다. 옳은 길을 주장하는 사람들만 억울하게 당하고 손해본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보아왔고 체험한 것이다.


군대 내의 ‘하나회’라는 사조직으로 인하여 육사 출신 중 비(非)하나회 장교들이 보직 및 진급 등 경쟁에서 부당하게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해서 서로들 쑥덕거리기는 했어도 어느 누구도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그 부당성과 문제점에 대해서 정식으로 항의한 적이 없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그들에게 찍혀서 피해를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라고 외우던 사관생도의 신조가 무색했다. 명예 제도니 군인 정신이니 말들은 그럴 듯 했지만 손익 계산 앞에서 이런 것들은 헌신짝처럼 던져지고 말았다.




12. 12 반란과 김오랑 소령


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은 우리나라의 민주 발전에 가장 부끄러운 3가지 역사적 사실을 성공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인정해야 한다. 5. 16 군사 쿠데타를 성공하게 만들었고, 12. 12 군사반란 그리고 광주 학살의 주도 등이다. 지금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이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정리하여 생도들에게 말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군대가 주동했던 역사적 사실을 군 자체에서 정당한 평가를 하지 않고 어물어물 적당히 넘긴다면 말이 안 된다. 실수와 잘못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통하여 어떤 깨달음과 교훈을 얻고 있느냐이다.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에서도 옳고 그름이 설명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무슨 방법으로 도덕적 용기와 정의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지 않고 어떻게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12. 12 반란이 성공되어 가는 과정의 상황을 살펴보면 육사 출신들 앞에는 국가도 민족도 군대도 없었고 오직 육사 출신 저들끼리의 집단이기적 선․후배만 있었다. “나 아무개야! 출동하지마!” 이런 몇 마디의 말로, 정상적인 군대 내의 지휘 계통과 명령 체계는 일시에 와르르 허물어졌다. 시키는 대로 “예! 선배님 알겠습니다”라고 하며 움직였다. 도청(盜聽)과 감청(監聽)으로 정보를 완전 장악하여, 육사 출신이라는 관계를 이용한 전화 통화만으로도 진압군을 무력화시키고 반란을 성공시켰다.


특전 부대가 자기들의 상관인 사령관 정병조 장군을 체포하려 공격해왔을 때, 부관이었던 김오랑 소령만은 항복하지 않고 사령관을 끝까지 사수하다가 몸뚱이는 벌집처럼 총알받이가 되어 그 자리에 쓸어졌다. 그의 시체는 걸레 조각처럼 되어 여러 날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육사인의 가슴속에 김오랑 소령은 아직도 버려진 상태 그대로이다. 


12. 12는 이미 반란이었다는 심판을 받았고 주동했던 사람들도 법률적 죄 값을 받아 정리되었다. 그러나 사관학교의 전통과 정신사적으로 이를 어떻게 해석하여 후배들에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전혀 정리가 되지 않는 상태로서 범죄자들이 더 유능한 선배로서 과거의 명성과 어뗳게 모았는지 모를 막대한 재력을 가지고 후배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활개를 치고 다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지극히 간단하고 분명한 사실 하나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하고 강자들, 기득권자들의 눈치나 보며 어물쩍 하면서 생도들에게 어떻게 국가와 민족 그리고 정의(正義)와 역사 의식을 말할 수 있으며 미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심어 줄 수 있겠는가?


김오랑 소령! 그의 그 장렬한 죽음은 참 군인의 귀감으로서 어떤 형태로든 생도들의 가슴속에 기리 남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육사가 낳은 참으로 자랑스런 영웅으로 후세에 이야기될 수 있도록….




광주 학살, 사관생도 신조는 없다


우리 민족은 굴곡 많은 현대사를 살아오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변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달리며 힘  겹게 살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원통하게 죽고 찢기며 짓밟혀 왔어도 호소할 곳 없이 그저 당하기만 해온 너무나 슬프고 서러운 한 많은 민족이라 아니할 수 없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와 전남 지역이 시민군의 장악 하에 놓여있던 때 군의 계획에 따라 서울 지역에 근무하고 있었던 전남 광주 출신 간부들이 광주의 상무대에 급파되었다. 데모에 불참할 것을 종용하는 선무 활동을 위해서였다. 현지의 실재 상황과 형편을 들어보니 ‘초동 강력 진압’이라는 미명 하에 비무장 시민에 대해서 너무나 무자비하고 처참한 살육을 감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인의 본분이 무엇인가? 같은 민족이 아닌 경우에도 인간을 향해 그토록 잔인 무도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당시 광주시의 상황은 무정부 상태라 하기보다는 독재에 항거한 민중이 승리해서 수립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자치정부의 질서가 구현되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실천한 위대한 경험이었다. 동학군 선배님들이 전북 지역에서 일어나 풀지 못한 민주 대동천하의 한을 전남 지역에서 며칠 동안 풀어드린 거나 다름없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보니 진압군의 잔악한 행위에 대해서 치를 떨어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민족 의식이 결여된 잘못된 육군사관학교의 훈육 그리고 식민사관에 찌든 자들에 의해서 민족혼을 빼어버린 잘못된 우리 군대의 모습이었다. 점령군으로서의 일본군을 도와 민족을 압살해왔던 친일 세력들이 이끌어 온 군대의 진면목이었다. 민족 의식에 대해서 아무 교육도 받지 않았던 사관학교 출신들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여겼다.


접근이 불가능하니, 전화를 걸어서 일가 친척이나 학교 선․후배들에게 ‘폭도’들 편에 가담하지 말 것을 설득 종용하라고 했지만 나는 마음에 없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갑자기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며 송정리 비행장으로 실려 가서 한참을 기다렸다. 무장 헬기들이 요란스럽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저들이 저 헬기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할 것인가를 생각하니 치가 떨리고 눈물이 쏟아졌다. 자칭 한국의 패턴(George Smith Patton) 장군이라 칭하는 홍성태 선배도 그 특유의 곳곳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내 옆에 서있었다. 원망스레 하늘을 향해 그 큰 눈망울을 굴리면서 한숨을 내쉬더니 “명렬아! 이것은 너무 큰 비극이다. 비극이여!”라고 짧게 말했지만 그 속에는 우리들의 길고 긴 이야기들이 모두 담겨 있었다.


나는 당시 광주지역에 근무하고 있었던 육사 출신 장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똑같은 사실을 두고도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하는 생각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광주 지역 주민들의 기질을 들먹이며 불순세력에 놀아났다는 등 한번 된통 혼이 나야 싸다는 듯이 말했다. 마치 영화 「킨타쿤테」에서 노예로 팔기 위해 아프리카 사람들을 마구 사냥하는 백인들처럼, 아무 양심의 가책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투였다.


이것은 바로 사관학교 훈육이 너무나 잘못되었음을 웅변으로 입증시켜 주는 사실이었다. 보통의 양심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그것은 그곳 주민들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고 조국의 민주화에 관련된 문제였다. 4년 간 훈육을 제대로 받은 간부들이라면 이 정도의 사안에 대한 기본 인식이 이렇게 다를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은커녕 보통 사람 누구라도 당연히 가지고 살아가는 극히 보편적인 정의감마저도 배양되지 않은 것이다. 말로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고 외우면서 강자의 눈치나 살피며 개인의 입신 출세와 영달을 꾀하고자 하는 이기적인 기회주의자들을 양산한 것이다.




세뇌 작업, 육사 훈육의 문제점


생도시절 우리 중대와 인접해 있던 제3중대는 상급생들의 기압이 특별히 심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저녁식사가 끝난 후 자유시간이면 하급생들은 날마다 군장을 메고 끙끙거리며 이리 뛰고 저리 달려 늘 우리를 불안하게 했다. 어느 날 평온하던 우리 중대에도 갑자기 찬바람이 감돌기 시작했다. 저녁식사 후 즉시 2학년 생도들은 전원 중대 강당에 집합하라는 불호령이 떨어 졌다. 3학년 생도들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꾸물거린다고 으름장을 대며 닦달하는 것을 보니 크게 혼을 내려고 단단히 벼른 것 같았다. “귀관들 형편없어” 연설이 끝난 다음, 특성 훈련(기압)이 시작되었다. 이유는 우리가 1학년 생도들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아 예의도 없고 군기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주먹 쥐고 엎드려 팔굽혀펴기부터 시작했다. 선배들은 몽둥이를 들고 이리저리 다니며 조금만 자세가 흐트러트려져도 우리들의 엉덩이를 마구 두들겨 팼다. 비명 소리와 신음 소리, 긴 한숨 소리가 연신 계속되었다. 괴로움과 공포에 대한 반응도 갖가지였다. 이것은 일단 우리의 기를 꺾기 위한 전주곡이었다. “각자 완전 군장하고 와 !. 왜 이리 꾸물거려!, 선착순이야 !”, “팬티를 제외하고 모두 벗어!. 다시 입어!” 그 날의 메뉴는 ‘입어’와 ‘벗어’를 반복하는 기압이었다. 몽둥이를 들지 않은 상급생들은 우리를 에워싸고 “형편없어!. 형편없어!”하며 으름장을 댔다. 강당 안은 마치 도살장 같은 공포의 분위기였다. 땀은 비 오듯 우리들은 기진 맥진 지쳐있었다.


“최용 생도, 귀관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팬티 바람으로 서있는 그를 향해 느닷없는 질문이 쏟아졌다. 물론 “저희들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1학년 생도들을 철저히 교육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모범 답안을 기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전혀 빗나갔다. “예, 1702번 최용 생도. 어떻게 하면 옷을 빨리 입을까 그것을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너무나 엉뚱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정직한 답이었다. 혀를 깨물어 참고 참았지만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그만 나의 웃음보가 터지고 말았다. 여기 저기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상급생들도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밖으로 나가 있다가 한참만에 들어왔다.




사관학교 기초 군사훈련이나 신병 훈련소 교육의 특징은 우선 먼저 피교육자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습관을 씻어내는 세뇌 작업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훈련 과정에는 조금도 여유도 주어지지 않는다. 촉박한 일정을 몰아 부치며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든다. 백지 상태로 단순화시키는 것이 제1단계 작업이다.


우리는 입교하자마자,  동서남북이 어디인지도 분간하지 못하여 어릿어릿 하고 있을 때 날마다 선착순 뺑뺑이를 돌았다. 다른 생각을 할 조그마한 틈도 주지 않았다. 정신 없이 뛰고 움직였다. “어이 생도” 하고 지적을 받으면 즉시 그 쪽을 향해 막대기처럼 굳어진 차려 자세로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예, 1686번 표명렬 생도”라고 대답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해 잘 한다고 해도 우리를 향한 질책이 늘 기다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욕먹고 야단 맞고 기압 받고 우리는 완전히 넋을 빼앗겨 멍청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이렇듯 혼을 빼는 세뇌 단계의 교육은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바람직한 행동의 습관을 심어 주고 불어넣기 위해서 필요한 하나의 정지 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정지 작업 이후 그 이상은 없었다. 계속해서 혼을 빼는 작업만 되풀이해 멍청하게만 만들어 놓았을 뿐, 정작 지향하고 목적하는 바의 새로운 가치관과 의식의 알맹이를 심어주지 못했다.


사관생도 교육에서조차 총을 쏠 줄 아는 전투원을 만들기 위해 혼을 빼는 단계의 작업만 반복했을 뿐 정작 중요한 의식의 씨를 뿌리고 가꾸는 부분의 작업은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형의 간부를 육성할 것인가에 대한 비전을 그리지 못했다. 남들이 그려 놓은 흔한 그림의 복사판으로 대치하였을 뿐, 우리의 정신과 혼을 담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는 우리 군대에 대한 분명한 철학과 사상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서 군대가 운용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용 생도의 그 답은 바로 지금까지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는 우리 군의 모습일지 모른다. 우리의 장병들이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 내가 지금 여기 왜 서있는지에 대한 깊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전전긍긍 이리저리 쫓기며 귀중한 시간을 빼앗기도 있는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우리 군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다.




「민족일보」 구독 사건


시골뜨기가 서울에 올라와서 미 8군 앞을 지나면서 소문으로만 들었던 ‘양공주’라는 이름의 여자들이 미군 병사들을 유혹하며 가진 교태를 부리고 서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밀즈(C. Wright Mills)의 「들어라 양키들아」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쿠바 소녀들의 비참한 모습을 피눈물 흘리는 감동으로 읽었다. 쿠바인들의 한 맺힌 울분, 그리고 카스트로(Fidel Castro)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제나 짓밟히고 찢겨 오기만 한 서러운 우리 민족의 슬픈 역사를 생각하며 우리가 늘 비장한 각오로 부르던 육사 교가의 가사 말처럼 우리는 “모진 역사 역역(歷歷)히 은(銀)보래 치리”의 때를 준비하며 민족에 대한 뜨거운 정을 끊임없이 일깨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대한민국 국군은 민족의 군대다. 국군의 존재이유, 이념, 전통, 자부심, 의미, 모두가 민족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사관학교 어디를 둘러 봐도 민족의 혼이 살아 숨쉬기를 바라는 어떤 상징이나 구호, 교육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아무도 민족을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때는 캠퍼스 안의 명당 자리라 할 수 있을 도서관 옆 중심부 자리에 벤프리트(James A. Van Fleet)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서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처럼 지나가는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가 가지고 사용하는 모든 무기와 군수물자는 말할 것도 없고 보급품까지도 거의가 미국 제품이었다. 밥 떠먹는 수저에도 ‘USA’라고 적혀 있었고 철모, 야전삽, 모포, 군화는 물론 단화, 장갑, 양말까지 모두 미군 것이었다. 소총 들고 완전 군장으로 뛸 때는 ‘USA’ 표지를 부친 물건들끼리 서로 부닥쳐 내는 소리가 마치 나를 조롱하듯, 정신 차리라고 경고하듯 들리곤 했다. 가난한 나라의 군대니 어쩔 수 없었고 이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고 꿈만 제대로 잃지 않고 있으면 전혀 부끄러울 일이 아니었다. 무기를 우리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꼭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정신, 혼을 간직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더욱 중요했다.


군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우리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가야할 길은 어디인가? 등의 물음은 민족을 떠나서는 답이 없음에도 제일 중요한 이 민족이라는 주제가 우리 군에는 빠져 있었다. 우리 국군은 민족문화의 정통성과 삶의 터전을 지켜온 자랑스런 민족의 군대임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당시 사회적으로 지도적 위치에 오른 분들 대부분이 친일 세력들이었다. 그래서 ‘민족’을 내세우는 자는 붉은 색에 가까운 위험한 진보 세력으로 몰아 부치는 분위기였다. 가장 반민족적 입장에 서있었던 사람들이 가장 투철한 애국자로 둔갑하여 나라의 힘있는 자리를 다 차지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4.. 19 이후 진정으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민족 문제 논의에 목말라 하고 있던 중에 「민족일보」라는 일간지가 창간되었다. 제호만 봐도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차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 누구보다 민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나는 선득 구독해 읽었다. 다른 동기생 몇 명도 읽고 있었다. 이들 중에 몇 사람은 외부 대학생들과 이 신문을 중심으로 어울리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두 명의 동기생이 퇴교되었다. 허가되지 않은 조직 활동을 했다는 이유였다.


민족 정신은 민족사에 흐르는 선인들의 정신과 활동을 보고 배우며 함양된다. 그 중에도 가장 가까운 기간의 역사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큰 감명을 준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목숨 바쳐 투쟁한 항일 독립 전쟁에서의 우리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결코 빠뜨릴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에 대한 어떤 교육도 받은 적이 없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면서도 민족의식을 통한 존재 이유에 대해 설명이 되지 않는 군인이 과연 어디에서 자부심을 얻을 수 있겠는가? 자부심 없는 군대는 죽은 군대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군국주의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분들이 이끌고 가던 우리 군의 일그러진 모습이다. 군의 큰 기둥을 양성한다는 사관학교의 교육이 그 모양이었으니 다른 분야는 더 말할 나위 있었겠는가!




씁쓸한 육사 발전기금


현재 육군사관학교에서는 육사 발전기금을 모금하여 그 액수가 이미 몇 십억에 이르고 있다. 아마 육사를 졸업한 사람 치고 모교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일에 동참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먼저 어떻게 하는 것이 육사의 발전인지 또한 기금을 모금하는 것이 진정으로 학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렇게 하는 것이 과연 우리나라와 군 전체를 위해 바람직한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원칙적인 면에서 나는 납득할 수가 없어서 지금까지 모금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하거나 말거나 개인적인 판단의 문제라면 굳이 나서서 반대할 이유가 없지만,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해서는 안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고자 한다.


먼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점은 기금을 조성하여 지원하는 것이 육사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발상 자체이다. 육사가 발전한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에 대한 개념과 비전 설정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현재 육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문제점이 예산상의 문제인가? 예산은 많이 있을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다른 사업과의 균형과 연계성도 고려되어야 하고 그로 인해서 파생되는 문제점을 생각해야 한다. 국가 예산이 미치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사업은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정부가 해주지 못하거나 해주지 않은 사업을 선배들이 중심이 되어 모아 준 자금으로 한다면 이는 교육 목적 상 큰 문제이다.


육사는 육사 출신이나 생도들의 육사가 아니다. 특수한 목적으로 세워진 국가 유일의 기관이다. 육사 발전을 위한 관심은 국가적이고 국민적 관심이어야 한다. 예산이 필요하다면 정상적인 절차를 밟아 정부 재정으로 조치하면 된다. 편법으로 손쉽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그것은 애교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라 말할지도 모르지만, 국민들이 육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이상으로 육사 출신들이 육사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 아니다. 육사 출신은 국가와 군 전체에 대해서 애정을 가져야 한다. 특히 현역 장교들의 동참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육사 출신 장교는 장교의 모범이다. 장교단 전체의 단합을 생각해야 한다. 육사 출신이 아닌 다른 장교들에게도 똑 같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현역 복무 중인 선․후배간에 다른 장교 출신들과 구별되는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끼리끼리만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국민들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폐해가 바로 12.12 반란이었음을 명심해야 한다.


한때 군내 출신별 모임 등을 강력히 금지시킨 적이 있다. 이는 물론 독재 정권이 군에 의한 전복 활동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기금 모금은 그런 모임에 비견할 수 없는 훨씬 엄중한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음을 심사 숙고하기 바란다. 장교단의 단합을 심각히 저해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내세운 말이 아무리 거창하다 해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출신별 집단 이기주의를 초래하는 그런 일은 국가에 해가 된다.


생도들은 장차 나라의 기둥이 될 인재들이다. 소아병적인 출신 구분을 뛰어 넘는 모범을 보여야 한다. 원칙에 엄격해야 한다. 선배들이 걷어준 기금으로 해외 순방 등 공식 활동에 활용한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군률에 위배되는 일이다. 육사는 교육기관이지만 또한 군 조직이다. 어떻게 제도권 밖의 자금을 유입하여 생도 훈육 등 군대 내에서 공적 목적에 활용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외국의 예가 어떻고, 민간 대학이 어떻다는 등 구구한 변명은 필요 없다. 외국의 군대와 사관학교가 우리와 같을 수 없다. 그 나라 군대의 성격, 사관학교 출신들의 사회적 역할과 위치 그리고 국민적 인식 등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자금이 있는 곳에는 그것의 운용을 두고 보이지 않은 여러 가지 예상 밖의 문제들이 발생할 수도 있다. 육사 동창회는 육사 출신들의 친목을 위한 조직의 성격에 충실해야 한다. 현재 모금된 기금은 육사의 시설 및 기재 구입 등에 활용하고 더 이상의 자금을 보유하는 일이 없도록 조치되어야 한다. 육사 발전을 위해서 육사 출신들이 할 수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각자 삶의 현장에서 주위로부터 존경받고 모범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껍데기 총뿐인 졸업식


육사 졸업식에는 꼭 대통령이 참석했다. 학교 전체가 긴장을 하고 예행연습을 하느라 요란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때만은 그래도 졸업생들이 대통령과 악수할 때에 ‘손을 너무 꼭 잡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축제분위기가 흐려질 정도의 심한 예행연습은 없었다. 그러나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박정희 대통령 때부터는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우선 졸업식 전날부터 청와대 경호실 사람들과 보안사 요원들이 대거 몰려와서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는 모습부터 눈에 거슬렸다.


우리를 너무나 실망시킨 것은 졸업식장에 들어오기 전에, 생도들이 메고 가는 M-1소총의 방아쇠 뭉치 안에 있는 공이(총탄을 치는 부분)를 빼놓고 나오라는 명령이었다. 분열식 중에 만일의 불상사가 벌어질 것에 대비하기 위한 보안상의 이유라고 했다. 물론 이것은 생도들에게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들이 5.16 쿠데타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육사 생도들을 가두 행진에 동원시킬 당시에도 우리는 소총을 빼앗겨 무장해제를 당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런 군인으로서 가장 수치스런 일을 당하고도 생도들은 무반응이었다. 제거된 방아쇠는 방첩부대에서 회수해 보관했다가 졸업식이 끝난 다음에 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졸업식 때면 생도들은 계속 껍데기 총을 들고 통수권 자를 향해 ‘받들어 총’과 ‘우로 봐’를 했다. 이런 모습 속에는 어쩌면 생도들의 마음을 가장 상징적으로 잘 표현해주는 진실이 담겨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때부터 우리 군은 본연의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군은 사실상 독재권력을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들은 군이 정신적으로 병들거나 말거나 아무 관심이 없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군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신성한 국방의 의무’ 등 본래의 아름다운 의미는 입술에서만 맴돌았을 뿐 장병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갔다.


이런 분위기에 부대끼며 군의 최고 직위까지 올라갔던 예비역 장성들이니 민족이 지향해야 할 비전에 대해서 무감각함은 물론 우리 앞에 당면한 현실에 대한 인식도 매우 편협한 것인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바야흐로 남․북이 냉전 체제 하에서 빚어졌던 증오와 불신 그리고 적대 의식을 해소하고 평화와 화해를 향한 민족사적 대장정의 길을 향해 희망찬 전진을 하고 있는데도 이를 가장 강렬하고 집요하게 반대하는 세력으로 국민들에게 비추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사에는 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이 권력의 폭력에 의해서 원통하게 희생당한 사건들이 너무나 많다. 거창 사건, 4.3 제주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은 인권과 생명이 무시되고 과잉학살이 자행되었던 예들이다. 마치 일본 제국군대가 우리나라 독립군과 광복군을 토벌하기 위해 마구잡이 학살을 감행하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던 것과 똑같은 현상 그대로가 광복된 조국의 하늘 아래서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 안보와 체제 수호’,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만 들먹이면, 모든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중심에 바로 군대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군 당국은 그 때 당시에 권력의 편에서 일방적으로 작성한 학살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 그대로를 초지일관 주장하는 것이 군을 위한 길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 억울하게 당하고 누명을 쓴 피해자들의 입장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몇 년 전 국방일보에 게재되었던 제주 4.3 사건의 진상에 대한 장병 교육 내용이 바로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기 복무했던 예비역 장교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서슬 퍼런 독재 권력이 냉전적 시각에 입각하여 주장했던 정권 안보적 거짓 논리에 세뇌되어 지금도 그런 행동이 애국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음을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일부 수구 언론이 과거 불행했던 역사를 사실대로 알려주고 여론화하여 정의를 바로 세우려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색깔 덧칠하기를 무기 삼아 잘못을 저지른 측의 대변인 역할만을 자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군은 이러한 문제들을 한번도 심각하게 고민하며 개혁하려는 노력 없이 지금까지 지내왔다. 그래서 군 출신들로 구성된 여러 단체가 많지만,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는 역사 왜곡 사건이나 매향리 사건이나 미선이 효순이의 원통한 죽음 등에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조용히 입을 닫고 있으면서 ‘국가보안법 개정 절대 반대’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말만 되 내이고 있는 것이다. 군은 이제 이런 긴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통수권자가 껍데기 총을 든 생도로부터 분열을 받지 않아도 되는 그런 군대를 만들어야 한다.




비장하게 불렀던 육사 교가


우리가 사관학교 교가를 부를 때에는 애국가를 제창할 때처럼 하던 일을 멈추고 꼭 일어나서 차려 자세로 불렀다. 특히 ‘천추 만리 바람결은 이야기 하리!. 백사 고쳐 쓰러져도 육사 혼이야, 가고 오지 않으리!. 오지 않으리!. 풍진노도 해쳐나갈 배움의 전당. 모진 역사 역력히 은 보래 치리!. 아~’!--‘ 대목에서는 우리들의 얼굴은 굳어지고 늘 엄숙해졌다. 애국가보다 더 장엄하고 비장하게 눈시울을 적시며 불렀다. 때로는 혁명가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곤 했다.


생각해 보면 그 속에는 독립군, 광복군 선배님들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던진 희생에 대한 추앙이나 흠모의 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우리들의 생명까지 즐겁게 바쳐야할 ‘민족’이라는 단어 한 마디도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각자 스스로가 마음 속 깊이에 정해 놓은 높고 깊은 의미에 도취되어 눈물 흘리며 목이 터져라 큰 소리로 불렀었다.


세월이 흘러 모두 백발이 된 지금, 동기생 모임에서 어쩌다가 교가를 부를 때면 그 때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멋쩍은 면이 많다. 내가 광복군 선배님들의 초라하고 누추한 사무실을 처음 찾아갔을 때 노 선배님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시고 팔을 힘껏 흔드시며 목청껏 광복군가를 불러주셨다. 그때의 그 장엄하고 비장한 모습의 기개와는 너무나 다른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 더 이상 초라해지지 말자!




<에필로그 본문>




개혁을 시작하며




전방에서 만났던 한 기자


군대 생활을 하면서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이래저래 눈물 흘린 날도 많았었다. “사나이가 무슨 놈의 눈물이 그렇게도 많으냐”는 핀잔을 자주 듣기도 했지만, 잘 고쳐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비가 온 뒤에 산천이 깨끗해지듯이, 눈물을 많이 흘리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볍고 맑아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술이라도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에는 세상만사가, 모든 사람이 다 슬프게만 느껴졌었다. 그리고 이 땅의 많은 억울하고 슬픈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었다.


군단 관할 지역 내에는 삼청교육대가 두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곳에서 그들의 정신 교육 특강을 위해 자주 방문했다. 삼청교육대에 끌려온 사람들의 몰골을 보면 가지각색이었지만, 대체로 키가 작고 깡마른 사람들이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세파에 시달리며 구박받으면서 자라온 천덕꾸러기들의 집합소 같았다. 눈치만 살피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표정들이 가엾기 그지없었다.


그 중에는 성경구절을 줄줄 암송하고 찬송가도 큰소리로 잘 부르며 너무나 자연스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감정을 넣어 막힘 없이 기도하는 사람도 많았다. 내가 강의를 하기 위해 들어가면 그들은 천막이 찢어지고 날아가 버릴 듯이 큰소리로 박수를 치며 찬송가를 불렀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신앙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주로 이에 관련시켜 말하곤 했다. 그들은 나를 설교하러 온 목사로 착각하기도 하였다. 억울하게 잡혀왔음을 호소하는 내용을 쪽지에 적어 번개처럼 나에게 전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한 번은 전방사단 지역에 신문사 간부 및 기자들이 대거 방문하였다. 당시 한창 이름을 날리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던 내 또래의 기자도 있었다. 평소 그의 수려하고 설득력 있는 필치로 봐서 나는 그가 매우 정의감이 있는 분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신경을 써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힘들게 삼청교육대의 문제점에 대하여 넌지시 말을 던졌다. 기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틀림없이 구체적인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내 얼굴을 힐끔 한번 쳐다보더니 못 들은 척 딴전을 피우다가 이내 다른 자리로 옮겨 버렸다.


나는 민망스럽다 못해 참으로 실망스러웠다.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름 있는 기자들이라는 자들이 저렇게 현실 타협에 영악한 것을 보고 분통이 치밀었다. 물론 민주화를 위해서 정의의 편에 서서 온갖 핍박과 불이익을 당하면서도 꿋꿋이 지조를 지켜온 훌륭한 언론인들도 많았지만 그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많은 언론인들이 양심을 뒤로하고 독재 정권을 비호하며 권력이 주는 단맛을 즐기고 있었다. 언론인들에 대해 뭔가를 기대했던 내가 큰 잘 못이었다.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마지막 회)
제2회 유족 증 언 사례발표 대회 축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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