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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장 받으려 고문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 7 >

2007-10-25 22:47:31, Hit : 6955

작성자 : 표명렬
2. 군인다움에 대해 묻기.

귀를 자르다


월남에 도착한 지도 며칠 안 되었는데 대대에서는 전과(戰果)가 없다고 독촉이 심했다. 정찰 중에 적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더니, 시체의 귀를 짤라 보내라고 했다. 대대장과 그 참모들의 사고방식은 완전히 임진왜란 시대 수준인 것 같았다. 왜구들이 7년 동안이나 우리 강산을 초토화하면서 우리 의병할아버지들의 귀를 잘라 일본으로 가져다 귀 무덤을 만들었던 것과 같은 방식 그대로였다. 얼굴을 찌푸리며 대검으로 어렵게 귀를 잘라 피를 떨구며 신문지에 쌓아서 헬기편으로 보냈다. 너무했다 싶었던지 다음부터는 그만 두라고 했다.


상급부대에서는 전과(戰果)에 대한 신빙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불신 때문에, 이리저리 궁리 끝에 결국은 노획한 무기의 숫자에 의해서 논공행상을 한다고 했다. 이때부터 지휘관과 부대원들은 적의 총을 찾는 일에 혈안이 되었다. 이를 둘러싸고 주민들로부터 총을 사오는 등 너무나 부끄러워 말로 할 수 없는 별별 한심스런 작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소총 자루의 수에 훈장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중대가 주둔지 근방을 수색 정찰하다가 도망가는 듯한 한 젊은 친구를 붙잡아 왔다. 연대 포로 심문반의 도움을 받아 심문을 했지만 자기는 이 앞 동네에 사는 농부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틀림없이 베트콩이라고 단정했다. 전과도 올려야 하는 다급한 마음에서 우리는 자백을 받기 위해, 월남 말로 총을 어디다 숨겼느냐는 뜻의 “슘마이 어더우”를 반복하며 야전삽 자루로 엉덩이를 끊임없이 치며 자백을 강요했다. 그러나 시종 “없다. 모른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 민족도 임진왜란, 병자호란, 36년간의 일제 치하, 한국 전쟁, 민주화 투쟁 과정을 거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당했을까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연대 본부 포로 심문 반에서 지원 나온 월남인 통역관은 자기 동포가 그렇게 무참히 당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동정의 기색이 없었다. 항일 독립 운동 당시의 앞잡이 형사와 조선인 헌병 조무래기, 관동군의 초급장교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다.


많은 고급 간부들은 이곳 전장에 와서도 본국에서 하던 양태 그대로였었다. 아랫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피곤한 경쟁을 시키면서 쾌감을 느낀 듯 거드름만 펴고 있었다. 자기들의 윗사람과 외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에만 관심 가지고 갖가지 번지르르한 쇼 같은 겉치레나 하고 있음이 눈에 환히 보였다.




두코전투에서 배움


‘두코 전투’는 공비 토벌 식의 수색 작전만 하던 월남 참전 맹호 부대가 처음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월맹 정규군과 싸운 전투로써 대단한 전과를 올렸었다. 이 전투에 참여했던 기갑 연대 제9중대의 하사관 및 병들은 전원이 일 계급씩 특진을 했고, 중대원들 모두가 훈장을 받았다.


우리 대대가 두코 지역으로 이동한 후, 최초에는 내가 속해있는 11중대가 그 곳 전초기지를 맡아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작전 지역은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있는 밀림의 대평원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캄보디아 국경을 통해서 침투해 들어오는 월맹 정규군을 포착하여 유입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중대 기지에는 적의 기습에 대비하여 미군 전차 1개 반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었다. 정글 속을 오가며 정찰을 하다가 하루해가 저물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기지로 돌아오면 우리는 얼기설기 판초 우의로 하늘만 대강 가려 이슬을 막아 잠을 이룬 다음, 아침이 되면 다시 전투정찰을 떠나곤 했다.


대대의 명령에 따라 우리는 제9중대와 임무를 교대하고 대대 본부가 위치한 안전한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제9중대장 이춘근 대위는 우리 중대와의 합동 근무 기간 동안 수색 임무 등을 제쳐두고 중대 본부, 소대 본부, 자동화기 진지 등 중대기지 전체를 탄탄한 유개호(有蓋壕)로 만들어 웬만한 포탄에는 견뎌낼 수 있도록 요새화 했다. 사실 이는 적과의 접촉을 시도하여 끊임없이 중대 기지를 이동해 가며 정찰을 계속해야 하는 기동작전 개념에는 전혀 맞지 않은 조치였었다. 교리에 어긋나는 이런 짓을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미군들은 “정글을 누벼야할 호랑이(맹호부대를 지칭)가 이빨이 빠져 단단히 겁을 먹고 두더지처럼 땅속으로 기어들어 간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교리상의 원칙으로 보면 극히 졸렬하고 엉터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방법이 두코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었다. 우선 중대 기지의 위치를 수시로 움직이지 않고 고정시켰기 때문에 적의 기습 공격의 목표가 되어 결과적으로 적을 끌어들였고, 다음은 적(敵)과 아(我)를 구분하여 포격할 수 없으리 만치 적이 다가 온 상태였지만 포병의 무차별적 진내 사격에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진지를 구축하였기 때문에 공격하는 적에게만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만약 우리 중대가 교대하지 않고 그대로 거기 있었다면 분명 전원 몰살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날도 제9중대원들은 고개를 낮추고 숨을 죽여 가며 정찰을 계속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지친 몸으로 중대기지로 돌아왔다. 군장을 풀고 막 취침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땅을 파는 듯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초병의 보고에 따라 미군 전차의 헤드라이트를 비추니, 철조망을 향해 그야말로 새까맣게 적이 밀려오고 있었다. 대전차 무기까지 갖춘 월맹 정규군 1개 대대가 호를 파며(적은 돌격 선에서도 개인 호를 팜) 돌격을 위해 전개하고 있던 중에 발각된 것이다. 불을 뿜는 치열한 전투가 개시되었다. 교체를 위해 전날에 도착했던 신임 중대장이 호 밖으로 뛰어 나가다가 전사했다. 내가 여태까지 보아온 중에 가장 자랑스럽고 멋있는 군인중의 군인인 이춘식 소위는 적과의 접전이 가장 치열했던 진지의 소대장으로 진두 지휘하다가 중상을 입고 참호 안에서 피를 흘리며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대대에서는 가용한 포병의 전 화력을 총동원하여 포 사격을 퍼부었다. 드디어 조심스럽게 VT신관(목표물 상공에서 파편이 되어 총알 쏟아지듯이 퍼붓도록 되어 있는 포탄)에 의한 진내 사격(아군 진지 내에서 적과 아군이 뒤엉켜 있을 때 적아 구분 없이 아군 머리 위에 가하는 포 사격)이 시작되었다. 


우리 중대는 적의 퇴로차단 및 증원 군 저지 임무를 띄고 그 격전장을 향해 야간 이동을 했다. 미군 비행기가 높이 떠서 밤새도록 끊김 없이 낙하산 조명탄을 뿌려주었기 때문에 행군 길을 찾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상황은 이미 끝나 있었다.


전장의 비참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너무나 처절했다. 피비린내가 숨을 몰아쉬기 어려울 정도로 자욱이 깔려 있었다. 포탄에 맞아 갈가리 작살나고 찢어진 176구의 월맹 정규군 시체가 짓이겨져 살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참혹하게 널려 있는 적의 시체가 있는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은 체 모두 맥을 놓고 축 처져 있었다. 미군 전차병들은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신이 난 밝은 표정으로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시체들을 한 구, 한 구 뒤적거리며 주머니 속을 검사하고 있었다. 중대 전투교범에 있는 그대로 전투가 끝났으니 첩보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표정들이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주월군(駐越軍) 총사령관이 헬기로 나라왔다. 비행기에서 내려 시체를 보는 순간, 그의 얼굴은 희열로 가득 찼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싱글벙글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이었다. 병사들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자기 어깨를 으쓱 으쓱 하며 “정말 잘했어! 잘했어! 완벽하게 해냈군!” 연신 칭찬이었다.


군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장에 나가 적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이것은 국가와 민족이 군인에게 부여한 신성한 의무이다. 국가를 위한 이러한 성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고도 즐겁지 않다면 어디서 군인으로서의 자존심과 보람 그리고 기쁨을 찾을 수 있겠는가? 군인이 적을 사살하고 전공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이다. 이러한 높고 거룩한 의미 때문에 군인은 참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책임을 수행한다.


미군들은 이등병이건 사성(四星) 장군이건 바로 이러한 군인으로서의 기본자세가 분명히 서있는 것 같아 참으로 부러웠다. 이것은 결코 군인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모든 직장인들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고 기쁘게 일할 것이라 생각했다.


미군 전차병들은 적의 시체로부터 얻을 수 있는 자료를 다 걷은 다음, 시신 조각들을 한 곳으로 밀어 모아 놓고 흙을 덮어 커다란 분묘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나무 가지로 만든 십자가를 그 위에 세우고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들 대부분은 기독교 정신에 따라 ‘인간은 존엄하다’는 이념을 바탕에 깔고 적을 사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적이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강한 자의 멋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하였다면 적의 명복을 빌었다고 책을 잡혀 필경 국가보안법 운운하며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곤욕을 치렀을지 모른다.


포탄이 비 오듯 퍼부어지고 총신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격렬한 사격 속을 헤치며 미군 위생병이 “위생병! 위생병!”을 외치며 이쪽 참호에서 저쪽 참호로 뛰어다니면서 부상자를 응급처치 하였다. 그 위생병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진두지휘하다가 쓸어졌던 이춘식 소위는 병원에 후송되기 전에 이미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만약 미군 1개 대대가 두코 지역에 투입되었다면 대대장 자신을 포함한 전 대대가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을 것이다. 정규전도 아닌데 1개 중대만 보내놓고 나머지 중대를 모두 대대장 주변에서 경호하는 식으로 맴돌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군 여단이 동원된 작전에 견습을 겸해 참여했을 때, 별을 단 여단장도 직접 소총을 들고 장병들과 함께 야지(野地)를 횡단하며 수색작전을 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대대장들은 항상 많은 예비대에 둘러싸여서 그것도 모자라 산꼭대기의 절대 안전한 지휘소에 앉아서 주로 헬기를 타고 왔다 갔다 했다.


이것이 어디 군대만의 일이었겠는가! 그동안 이 나라 각계각층의 소위 지도층들이라는 분들이 기득권의 철옹성을 쌓고 이에 방해되는 제도나 세력은 철저히 배격하며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월남전에서 높으신 분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훈장과 고문


월남의 뙤약볕 그늘 아래서, 하루는 대대 인사장교와 소대장 몇 명이서 맥주를 마시다가 고급 간부들의 전공 세우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작태에 분통을 터뜨렸던 기억이 있다. 작전 중에 이렇다할 전과가 나오지 않자, 대대장은 고문을 해서라도 소총을 찾으라고 꾸짖었다. 듣고 있던 이춘식 소위가 무전기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훈장 받으려고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라는 말이야! 아무리 전장이지만 절대로 그런 더러운 짓 못한다.” 나는 전장에서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통탄스러운 일도 보았지만, 이 소위 같은 자랑스런 군인도 많이 보았다. 당시 중대장은 거의 육사 16기 출신들이었고, 소대장들은 이춘식 소위와 동기인 20기들이었다. 1965년도 제1진으로 파병되었던 소총 중대 급 이하의 맹호부대와 같은 정예부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불행했던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나의 모교 육군사관학교에 대해 국민들의 실망이 참으로 크다. 여러 면에서 지금도 부끄러운 점이 너무나 많다. 그렇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래도 국가가 생명을 요구할 때 서슴없이 나가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 대부분이 육사출신들 말고 누구였던가?


세상은 아무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세상은 심지어 그들을 향해 용병의 입장에서 파월 되었는데 그것이 뭐 대단하냐고 빈정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를 너무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전쟁터에 군인을 보내는 결정은 정치인들이 한다. 그것은 국민의 동의에 의한 국가의 결정이다. 군인들은 그 전쟁의 성격과는 아무 상관없다. 최선을 다해 용감히 싸웠는가 아니면 비겁했는가? 만이 그들이 자랑스러운가 혹은 아닌가의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전투부대 제1진으로 월남전에 참가했었다는 이 사실 하나 때문에 내가 육사 출신임을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자부심을 간직하고 살아왔다.


문민정부 시절 어떤 모임에서 군 출신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들이 오고 간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조준사격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적 저격수의 눈동자가 가늠쇠 구멍을 통하여 당신의 가슴팍을 가늠자 위에 올려놓고 호흡을 조절하며 방아쇠를 당기려하는 것 말입니다”라고 대뜸 질문을 했다. 조심조심 숨죽이며 정글 숲을 다닐 때, 우리 소대장들은 나무 위에 숨어서 노려보고 있는 저격수들에게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맹호 5호 작전 시에 나를 향해 쏜 조준사격이 빗나가 바로 옆에 있던 1분대장 정원모 하사가 전사하였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나는 조준사격의 표적이 되었던 그때 일을 생각한다.




적을 바라봐야 군인이다.


남한강의 물줄기 따라 구비치는 홍천까지의 길을 거처 철정 검문소부터는 먼지가 뿌옇게 나는 비포장 산길로 들어섰다. 꾸불꾸불 아홉 살이 고개를 넘어 강원도 현리에 다다르니 비로소 나는 광주 민주화 과정 시 바른 말 한 죄(?) 때문에 보안사에 찍혀 귀양살이로 쫓겨 온 신세임을 실감했다.


거기 군단사령부 참모는 작전참모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 장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덜 약삭빠르고 정이 많았다. 특히 군단장 전성각 장군은 참으로 멋있는 분이었다. CPX(지휘소 연습)시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며 해박한 군사지식을 대하면서 저런 분을 따라다니면 결코 패전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장군으로서의 그의 기품은 참으로 돋보였다. 모두들 신 군부 세력에 빌붙어 한자리 얻어 보려고  눈치 살피며 혈안이 되어있는 분위기인데도 우리 군단장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의연하였다. 신 군부의 활동 모습을 마치 철없는 아이들이 지 피우고 있는 불장난쯤으로 보는 듯한 자세였다.


부대 내의 모든 행사시 지휘관의 훈시 문 초안은 대개 정훈참모가 써서 결재를 받는다. 당시는 대부분 별별 미사여구를 다 동원, 가장 충성심 넘치는 문구들로 구사하여 침이 마르도록 최고 권력자를 찬양 숭앙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사단장 연대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대장까지도 의례 “영명하신 대통령 각하의 위대하신 통치철학을 받들어 ……운운”의 충성 맹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보안부대 하사관들이 그런 류의 말을 몇 번했느냐? 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충성도를 파악하여 사령부에 보고한다니 마음에 없더라도 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군단장만은 달랐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내가 훈시 문 초안을 결재할 때, “나는 군사령관님의 뜻을 받들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돼! 군단장이 대통령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어!”라 잘라 말했다.


적과 접촉하고 있는 최 일선의 고급간부들 거의가 정면의 적을 쏘아보며 연구하기보다는 뒤쪽에 있는 서울의 육군본부와 보안사 사람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있을 때, 그는 외롭게 그러나 의연하게 날마다 정면의 적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단장은 매일 헬기로 군단 작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지형의 특성을 확인하고 연구했다. 전속부관의 말에 의하면, 퇴근 후 공관에서도 동그란 돋보기를 이리저리 굴리며 작전지역의 지도만 보아도 물소리 새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풀 냄새 흙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바윗돌 하나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게 익히고 또 익힌다고 하였다.




자전거 교장 님


대만의 정치 심리전 학교는 이 분야의 전문 요원을 양성하는 국방부 산하 대학 과정의 교육 기관으로 이곳 출신들이 대만 정부의 요소 요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79년 내가 이 학교에 두 번째 유학시절의 교장 친서우산(陣守山) 중장께서는 자주 자전거를 타고 교내를 순시했다. 생도들이 교장선생님과 마주치면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교장선생님은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을 흔들며 웃음 띈 얼굴로 답하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다정해 보였다.


그가 학생대의 식당을 순시할 때는 꼭 맨 먼저 취사장에 들려 더운 날씨에 밥 짓느라 땀 흘리며 고생하고 있는 취사병들의 등을 어루만져 위로한다. 언제나 가장 힘들고 그늘진 곳에서 일하고 있는 병사들을 찾아가 칭찬하고 격려한다. 나를 더욱 놀래게 했던 것은 졸업 기념 촬영이 끝난 다음 학생들은 마치 친 형님이나 다정한 친구를 대하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어깨동무도 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었다. 삼성(三星) 장군을 대하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후배 장교들을 대하는 장군의 모습도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목에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교육기간 동안에 바로 이런 것을 배운다. 계급이 아주 높아지면 부하들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군인답다는 말이 장군의 모습과 위관 장교와는 어떤 면이, 무엇이 다른지를 윗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터득한다.


내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우리 교장님은 늘 품위 있는 검정 세단을 타고 교내를 순시하였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차가 조심스럽게 정지하면, 전속부관이 재빠르게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지휘봉을 들고 차에서 내릴 때 교장님의 금테 안경은 더욱 빛나 보였다. 위압적인 모습으로 뭐라고 한마디 말하면 뒤 따라 오던 참모들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받아 적곤 했었다.


그 위세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멋있었다. 교장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항상 우리들이 최고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우리를 어떻게 바르게 훈육할 것인가 보다는 우리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인기를 더 끌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많은 분처럼 보였다.


물론 그분들의 나이가 너무 젊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한번도 민족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정의(正義)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역사의 현장에서 그런 문제를 두고 어떻게 처신해 왔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 했다. 다만 수식어가 좀 많기는 했지만 달변의 말솜씨와 멋있는 외모에 우리는 매료되어 있었다.




오복(五福)을 만드는 군사령관


내가 2군사령부에서 3년 6개월 동안 근무하면서 무려 네 사람의 군사령관이 바뀌었다. 네 번째 사령관 오자복(吳慈福) 장군은 누가 봐도 오복(五福)을 두루 갖춘 분이었다. 그것은 그의 이름 때문이 아니었다.  본인 스스로가 복을 창출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분은 칭찬이 주특기였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참모로 근무하는 동안 누구에게나 한번도 화내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항상 싱글벙글 모든 상황과 사람들에 대해서 긍정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음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보였다.


참모들이 결재를 받으러 들어갔을 때에는 그 내용이 아무리 못마땅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핀잔을 주는 법이 없었다. 문서에 서명을 하지 않으면서 그 업무와는 관련 없는 서울 다녀온 이야기며 일상적인 말을 하면 그 공문 내용은 마음에 들지 않아 부결되었음을 알아 차려야할 정도로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했다. “아주 잘 했어. 수고했어!”라고 하면 그것은 그냥 보통이거나 그 이하로 되었다는 의미로 들으면 틀림없었다. 마음에 아주 들면 결재를 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엄지손가락을 하늘로 치켜세워 “최고야! 최고!”라 하며 칭찬했다.


군사령부에는 헬기장을 겸하는 9홀 짜리 골프장이 있었다. 사령관은 참모들에게 늘 자신의 눈치를 보지말고 일과 시간 넘으면 열심히 운동들 하라고 했다. 해가 긴 유월 하순 어느 날 오자복 장군은 예하 사단을 방문하고 늦게 돌아왔을 때 우리는 골프를 치고 있었다. 당황해 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 만면에 웃음 띈 모습으로 손을 흔들며 “그래 공들 잘 맞아”하며 안심시키던 그 인간미 넘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흔히들 군대에는 칭찬이 없다고 말한다. 핏대 올려 핀잔만 주는 모습은 일본 군대가 한국인으로 구성된 사병들의 자존심을 빼앗고 열등감에 젖도록 만들기 위해서 취한 야비한 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았어야 했다.




서랍 속의 훈장 


나는 국내선 항공기를 이용할 때는 요금의 30%를 할인 받는다. 보훈의 달인 6~7월에는 아내까지도 50%까지 할인해 준다. 국가유공자로 예우 받고 있기 때문이다. 좋기는 하지만 그럴 때마다 늘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가 않다. 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국가가 수훈자들에게 그 공훈을 기리며 이에 상응한 혜택을 주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제도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로 어떤 사람들이 훈․포장을 받았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의 훈장 제도는 정말로 받을 만한 특별한 공적이 있어서 수훈 되는 경우는 극소수이고 속된 말로 출세한 사람들끼리 서로 나눠 먹기 식이 더 많은 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급 공무원, 교사 등 고위직의 공직자가 되면 거의 예외 없이 누구나 훈장을 받게 되어 있다. 나는 대령 때에 우리 부서에 할당된 보국훈장 ‘3. 1장’을 국군의 날에 받았었고, 장군 진급이 되고 나니 ‘천수장’이 할당되어 국군의 날에 받았었다.


다른 공무원들도 대다수는 거의 나의 경우처럼 오랫동안 별 사고 없이 근무했다는 평범한 이유만으로 받은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물론 ‘공적서’라는 것을 쓰고 심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치는 등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엄한 것 같은 과정이 있지만 이것은 이미 부서별로 훈장의 종류와 숫자가 할당되고 책임자와 관련 담당자에 의해서 누구누구에게 어떤 훈장을 준다는 것이 정해진 다음 요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정부의 각 부서는 관련된 특정 기념일 및 정년 퇴직일 등을 기하여 사기(士氣)를 진작한다는 이유를 들어 훈장을 남발했다. 그 결과 정말로 귀한 공로로 수여 받는 훈․포장의 가치까지 떨어뜨리고 있으며 또한 받은 사람 스스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오래 있다 보니 하나 얻은 것이라는 정도로 담담하게 느끼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 동안 훈장을 반납하겠다는 사람들이 심심하지 않게 나타났던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내가 정작 조국을 위하여 조그마한 공훈이나마 남겼다는 이유로 국가 유공자로서의 대접을 받는 데 있어서 자부심을 가지고 떳떳할 수 있다면 그것은 국군의 날에 의례적으로 받았었던 훈장 때문이 아니다. 국가의 해외 파병 결정에 따라 진정 죽기를 각오하고 파월 전투 부대 제1진으로 출정하여 소총 중대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던 사실을 자랑스럽게 간직하고 있는 마음의 훈장 때문이다. 내 일생 중 진정으로 훈장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고 여겨지는 공적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월남에서 만 1년 간의 전투’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적의 저격병으로부터 조준 사격도 받아가며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내 평생 가장 힘든 경험들을 했지만, 일 년 간의 야전근무를 마치고 귀국할 당시 나는 훈장을 받지 않았다. 사실이지,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나 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고생했던 병사들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개인적으로 세운 뚜렷한 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서도 나눠먹기 식이 너무나 많았었다는 점이다. 1차 파월 맹호 부대 소총 중대에서 나처럼 부중대장이라는 직위에 근무했던 장교들이 사실 그 역할이 가장 애매하고 그래서 늘 위험했다. 중대 보급 기지에는 중대 선임 하사가 남아 있었고, 우리 부중대장들은 꼭꼭 모든 전투에 참가하였다. 주 임무는 소대장이 결원 되었을 때 그 자리를 보충해 주는 부 소대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고생은 누구보다 많이 했어도 본인이 영악스럽게 관심을 가지고 밝히지 않은 한 그 나눠 먹기에 끼워주지를 않았다.


한 번은 전투 부대가 아닌 고급 사령부에서 전속 부관을 하고 있던 선배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 안에서 훈장 두 개를 꺼내 보이면서, 이것은 이미 받은 것이고 이 다음에는 이것을 받을 것이라고 자랑삼아 말했다. 당시는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후에 생각하니 너무나 야속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월남 참전 수훈자들의 수훈 당시의 부대와 직책 그리고 병과를 분석해 보면 웃지 못할 참으로 기이한 사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단언 할 수 있다. 훗날 대령 시절 군사령부 참모로서 나와 같이 근무했던 부관 참모는 부관 병과로 월남에 다녀온 분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사령부 급에서만 그야말로 편히 있다 온 분이다. 그가 얼마나 어떤 공로를 세웠는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훈장의 종류를 자랑삼아 설명하는데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상급 부대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 PX(피엑스) 등 지휘관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사람들, 보안대나 헌병대 등의 기관원들, 이런 사람들은 물론 제1순위였을 것이고 이들과 짝하여 나누어 먹기를 했을 것이니 그 업무를 관장하는 부관 참모로서 떡고물 좀 먹었다고 누가 감히 나무랄 수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신성해야할 훈장이 그렇게 취급되고 남발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훈장이 훈장으로서 온전히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가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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