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 평화재향군인회(가칭), 평화군인사랑회::

 
 
 
 
 
 
 
 

HOME > 평군자료실 > 표명렬의군개혁



 훈장과 고문

2006-03-25 17:02:47, Hit : 7281

작성자 : 표명렬
훈장과 고문

월남의 뙤약볕 그늘 아래서, 하루는 대대 인사장교와 소대장 몇 명이서 맥주를 마시다가 고급 간부들의 전공 세우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작태에 분통을 터뜨렸던 기억이 있다. 작전 중에 이렇다할 전과가 나오지 않자, 대대장은 고문을 해서라도 소총을 찾으라고 꾸짖었다. 듣고 있던 이춘식 소위가 무전기에 대고 욕설을 퍼부었다. “훈장 받으려고 멀쩡한 사람을 고문하라는 말이야! 아무리 전장이지만 절대로 그런 더러운 짓 못한다.” 나는 전장에서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통탄스러운 일도 보았지만, 이 소위 같은 자랑스런 군인도 많이 보았다. 당시 중대장은 거의 육사 16기 출신들이었고, 소대장들은 그와 동기인 20기들이었다. 1965년도 제1진으로 파병되었던 소총 중대 급 이하의 맹호부대와 같은 정예부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시 찾기 힘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불행했던 우리나라 정치사에서 한때 나의 모교 육군사관학교에 대해 실망의 목소리도 많았고, 여러 면에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래도 국가가 생명을 요구할 때 서슴없이 나가 목숨을 바쳐 싸운 사람들 대부분이 육사출신들 말고 누구였던가?

세상은 아무도 그들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 세상은 심지어 그들을 향해 용병의 입장에서 파월 되었는데 그것이 뭐 대단하냐고 빈정대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군대를 너무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전쟁터에 군인을 보내는 결정은 정치인들이 한다. 그것은 국민의 동의에 의한 국가의 결정이다. 군인들은 그 전쟁의 성격과는 아무 상관없다. 최선을 다해 용감히 싸웠는가 아니면 비겁하였는가 만이 그들이 자랑스러운가 혹은 아닌가의 기준이 될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전투부대 제1진으로 월남전에 참가했었다는 이 사실 하나 때문에 내가 육사 출신임을 언제나 마음 속 깊이 자부심을 간직하고 살고 있다.

문민정부 시절 어떤 모임에서 군 출신들에 대해서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들이 오고 간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조준사격을 당해본 경험이 있습니까? 적 저격수의 눈동자가 가늠쇠 구멍을 통하여 당신의 가슴팍을 가늠자 위에 올려놓고 호흡을 조절하며 방아쇠를 당기려하는 것 말입니다”라고 대뜸 질문을 했다. 조심조심 숨죽이며 정글 숲을 다닐 때, 우리 소대장들은 나무 위에 숨어서 노려보고 있는 저격수들에게 항상 노출되어 있었다. 맹호 5호 작전 시에 나를 향해 쏜 조준사격이 빗나가 바로 옆에 있던 1분대장 정원모 하사가 전사하였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나는 조준사격의 표적이 되었던 그때 일을 생각한다.


적을 바라봐야 군인이다.

남한강의 물줄기 따라 구비치는 홍천까지의 길을 거처 철정 검문소부터는 먼지가 뿌옇게 나는 비포장 산길로 들어섰다. 꾸불꾸불 아홉 살이 고개를 넘어 강원도 인재군 기린면 현리에 다다르니 비로소 나는 광주 민주화 과정 시 바른 말 한 죄(?) 때문에 보안사에 찍혀 귀양살이로 쫓겨 온 신세임을 실감했다.

거기 군단사령부 참모는 작전참모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반 장교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덜 약삭빠르고 정이 많았다. 특히 군단장 전성각 장군은 참으로 멋있는 분이었다. CPX(지휘소 연습)시의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며 해박한 군사지식을 대하면서 저런 분을 따라다니면 결코 패전하지 않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장군으로서의 그의 기품은 참으로 돋보였다. 모두들 신 군부 세력에 빌붙어 한자리 얻어 보려고  눈치 살피며 혈안이 되어있는 분위기인데도 우리 군단장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의연하였다. 신 군부의 활동 모습을 마치 철없는 아이들이 지 피우고 있는 불장난쯤으로 보는 듯한 자세였다.

부대내의 모든 행사시 지휘관의 훈시 문 초안은 대개 정훈참모가 써서 결재를 받는다. 당시는 대부분 별별 미사여구를 다 동원, 가장 충성심 넘치는 문구들로 구사하여 침이 마르도록 최고 권력자를 찬양 숭앙하는 내용 일색이었다. 사단장 연대장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대장까지도 의례 “영명하신 대통령 각하의 위대하신 통치철학을 받들어 ……운운”의 충성 맹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보안부대 하사관들이 그런 류의 말을 몇 번했느냐? 를 가지고 과학적으로(?) 충성도를 파악하여 사령부에 보고한다니 마음에 없더라도 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 군단장만은 달랐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처음 내가 훈시 문 초안을 결재할 때, “나는 군사령관님의 뜻을 받들어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 돼! 군단장이 대통령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어!”라 잘라 말했다.

적과 접촉하고 있는 최 일선의 고급간부들 거의가 정면의 적을 쏘아보며 연구하기보다는 뒤쪽에 있는 서울의 육군본부와 보안사 사람들의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있을 때, 그는 외롭게 그러나 의연하게 날마다 정면의 적 쪽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단장은 매일 헬기로 군단 작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지형의 특성을 확인하고 연구했다. 전속부관의 말에 의하면, 퇴근 후 공관에서도 동그란 돋보기를 이리저리 굴리며 작전지역의 지도만 보아도 물소리 새소리까지 들을 수 있고 풀 냄새 흙냄새를 맡을 수 있으며 바윗돌 하나까지 볼 수 있을 정도로 완전하게 익히고 또 익힌다고 하였다.


자전거 교장 님

대만의 정치 심리전 학교는 이 분야의 전문 요원을 양성하는 국방부 산하 대학 과정의 교육 기관으로 이곳 출신들이 대만 정부의 요소요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1979년 내가 이 학교에 두 번째 유학시절의 교장 친서우산(陣守山) 중장께서는 자주 자전거를 타고 교내를 순시했다. 생도들이 교장선생님과 마주치면 반가워하며 손을 흔들었다. 교장선생님은 한 손으로 자전거 핸들을 잡고 다른 한 손을 흔들며 웃음 띈 얼굴로 답하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롭고 다정해 보였다.

그가 학생대의 식당을 순시할 때는 꼭 맨 먼저 취사장에 들려 더운 날씨에 밥 짓느라 땀 흘리며 고생하고 있는 취사병들의 등을 어루만져 위로한다. 언제나 가장 힘들고 그늘진 곳에서 일하고 있는 병사들을 찾아가 칭찬하고 격려한다. 나를 더욱 놀래게 했던 것은 졸업 기념 촬영이 끝난 다음 학생들은 마치 친 형님이나 다정한 친구를 대하듯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어깨동무도 하면서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이었다. 삼성(三星) 장군을 대하는 모습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후배 장교들을 대하는 장군의 모습도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목에 힘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았다.

학생들은 교육기간 동안에 바로 이런 것을 배운다. 계급이 아주 높아지면 부하들을 어떤 자세로 대하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이다. 군인답다는 말이 장군의 모습과 위관 장교와는 어떤 면이, 무엇이 다른지를 윗분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터득한다.

내가 사관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우리 교장님은 늘 품위 있는 검정 세단을 타고 교내를 순시하였다. 미끄러지듯 움직이던 차가 조심스럽게 정지하면, 전속부관이 재빠르게 내려 문을 열어 주었다. 지휘봉을 들고 차에서 내릴 때 교장님의 금테 안경은 더욱 빛나 보였다. 위압적인 모습으로 뭐라고 한마디 말하면 뒤 따라 오던 참모들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받아 적곤 했었다.

그 위세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멋있었다. 교장님은 언제나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항상 우리들이 최고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우리를 어떻게 바르게 훈육할 것인가 보다는 우리들로부터 어떻게 하면 인기를 더 끌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많은 분처럼 보였다.

물론 그분들의 나이가 너무 젊었던 탓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한번도 민족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정의(正義)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역사의 현장에서 그런 문제를 두고 어떻게 처신해 왔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 했다. 다만 수식어가 좀 많기는 했지만 달변의 말솜씨와 멋있는 외모에 우리는 매료되어 있었다.




한국군 개혁 로드 맵<인물과 사상지에 연재했던 내용>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