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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초토화 작전 맞선 김익렬 장군 동상 세우자.

2008-04-03 10:25:58, Hit : 6236

작성자 : 표명렬
-김익렬 연대장 회고록, “4.3은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중폭동” -

주지하다시피 미국은 인디언 학살의 피의 터전위에 세워진 나라다. 지금도 단지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수십만 이라크 인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국익에 필요하다면 어떤 무자비함도 주저치 않는 그들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 현대사는 미군정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반도에서 그들 국익은 팽창하는 공산주의세력을 차단하고 동북아에 주둔할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조국광복과 동시 마땅히 처단되었어야할 민족반역의 친일군경 무리들을 그대로 이용했다. 그들이 “적색분자”라 지목만하면 그길로 파리 목숨처럼 사라져가는 공포의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제주 4.3의 본질적 모습이었다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근대사가 낳은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 단제 신채호 선생께서는 일찍이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 갈파한 바 있다. 오늘 우리 정치사회에 일고 있는 여러 부조화와 부조리의 근본원인을 따져 들어가 보면, 조국이 광복되었지만 민족내부의 아(我)가 비아(非我)인 친일세력을 청산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나라의 주도권을 빼앗김으로서 민족정기는 흐트러지고 민족적 자부심을 잃어버린 데서 기인된다 할 수 있다.


8.15광복 후, 정권욕에 눈이 어두워 정적 타도에만 몰두해온 이승만의 친일파 이용 흉계와 우리민족의 장래야 어찌되던 관심 없이 자신들의 국익을 기준으로 실용적으로만 대처해온 미군정이 비아(非我)를 득세케 만듦으로서 우리의 현대사는 비극으로 치닫게 되었다. 


민족반역의 무리들을 과거불문 등용하여 주구로 이용하려면 세뇌되어 찌든 식민의식을 씻어내고 민족혼을 불어넣는 재교육이 필수임에도 그런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급기야 매국적 친일분자들이 멸공애국투사로 둔갑하여 기고만장 활개 치게 되었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 그리고 민족정신이 반듯 뚜렷한 분들 대부분은 주류에서 밀려나 위축 몰락되거나 적색분자로 몰려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공권력을 독차지한 그들은 우리나라 실정에 어두운 미군정에 빌붙어 자신들의 과거를 들추어낼만한 민족의식 투철하고 바른말하는 정의로운 분들을 제거하기 위해 혈안 되어있었다. 제주 4.3은 그들이 노려온 절호의 기회였을지 모른다. 미군정으로서도 학살의 공포심 확산을 통해 우리 국민을 심리적으로 장악 지배할 수 있게 길 드리는 좋은 계기가 되었음직하다.


미군정 기에 발생한 이 사건은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참극이었지만 50년이 넘도록 역사의 진실은 암흑의 무덤 속에 갇혀있었다. 그들이 저지른 천인공노할 죄악상과 거짓으로 꾸며놓은 진상이 세상에 드러나게 될까봐 4.3에 관해 들먹이기만 해도 빨갱이로 몰아붙여 사실을 논의할 수 없도록 막아왔다.


최근 이른바 뉴 라이트 측에서 발간한 현대사 교과서에는 제주 4.3을 남로당에 의한 폭동 이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이는 4.3의 실상과는 거리가 먼 학살을 저지른 자들이 자기변명의 근거로 삼고자 만들어낸 내용에 불과하다. 아무리 편협 된 시각에서 기술하더라도 본래의 객관적 사실자체를 완전 무시 왜곡 조작하여 만든 내용은 역사라 할 수 없다.


훗날 12.12쿠데타세력이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저질렀던 광주 학살 때도 엉뚱하게 북한의 지령을 받고 있는 적색분자들이 조종하여 일으킨 폭동이라 국민을 속이며 살육을 감행했다. 남로당의 폭력적 소행 등 색깔로 뒤집어씌워 밀어붙이기만하면 공권력이 탄탄히 뒷받침 보호해주고 예의 사이비 신문이 맞장구쳐 튀겨 주기 때문에 안심하고 늘 써먹던 수법이다.


김익렬 장군의 증언


4.3 당시 제9연대장으로서 역사의 현장에서 상황을 장악 경험했던 김익렬 장군이 1969년 예편 후 집필한 회고록에서 4.3의 성격에 대해 명쾌히 기술하고 있다. 우선 회고록을 집필 하게 된 사유에 대해서 그는 “4.3의 기록들이 너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데 공분을 느꼈기 때문”이라 말하고 있다. 역사의 진실을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있는 세태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걱정되었으면 가족들에게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라” 유언을 남기고 1988년 세상을 떠났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우화처럼 직접 목도하고 경험해서 뻔히 알고 있는 사실조차 정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그 답답한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정의가 땅에 떨어져 거짓의 악령이 판을 치는 기막힌 세월을 보내느라 얼마나 한 맺히고 가슴 아팠겠는가.


그는 4.3의 원인과 성격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나는 제주 4.3사건을 미군정의 감독 부족과 실정으로 인해 도민과 경찰이 충돌한 사건이며, 관(官)의 극도의 압정에 견디다 못한 민(民)이 최후에 들고 일어난 민중 폭동이라고 본다. 당시 제주도 경찰청장이나 제주군정장관, 경무부장, 조병옥씨나 미 군정장관 딘 장군 중에 한 사라이라도 사건을 옳게 파악하고 초기에 현명하게 처리하였더라면 극소수의 인명피해로 단시일 내에 해결될 수 있었던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자신들의 과실을 잘 알고 있던 경무부장 조병욕씨 이하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죄상이 노출되어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까봐 진상을 은폐하기에만 급급했다. 설사 공산주의자가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치자. 그러나 제주도민 30만 전부가 공산주의자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폭동진압 책임자들은 동족인 제주도민을 이민족이나 식민지 국민에게도 감히 할 수 없는 토벌살상에만 주력한 것이다. 당시 정치지도자들이나 군경 책임자들이 수만 명의 선량한 양민을 공산주의자와 구별 없이 살해하고 자신의 보신과 공명만을 꾀한 것은 민족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라 통탄한다. 민족애의 불타는 참군인의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미군정의 초토화 명령 취소 설득


그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해방직후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한 후 4·3 발발 직전인 1947년 9월 제주에 주둔하고 있던 9연대 부연대장(소령)으로 부임하여 다음해 2월에 연대장(중령)으로 승진했다. 그가 제주에 온지 7개월 후 무장대에 의해 경찰지서가 습격당하는 등 4·3사태가 발발했다. 미군정은 즉각적인 토벌작전을 명령했으나 김익렬은 “극렬분자는 200~300명에 불과한 만큼 화평 귀순 선무작전을 시도하고,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경우 토벌해도 늦지 않다”라 제주도 군정장관을 설득했다.


그리고는 도내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귀순활동을 열심히 펼치면서 무장대와 비밀협상을 추진해 ‘4·28 평화협상’을 성사시킨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인질로 남겨두고 무장대의 은신처인 대정읍 구억초등학교에 운전병만 데리고 들어가 김달삼과 마주앉아 4시간에 걸친 담판을 벌인 끝에 평화협상 체결에 성공한다. 4·3 발발 25일 만의 극적인 합의였다.


그러나 평화협상회담 사흘 후인 5월 1일 제주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일단의 청년들이 들어와 12채의 민가를 불태우는 ‘오라리 사건’이 발생하면서 이 협상은 깨지고 말았다. 이는 평화협상을 파기하기 위해 경찰의 후원 아래 서북청년단과 대동청년단이 자행한 방화였다.


미군정은 김익렬 연대장의 위와 같은 보고를 묵살하고 ‘폭도들의 소행’이라는 경찰 측의 주장을 받아드려 9연대에 초토화 토벌명령을 내린다. 참으로 희괴한 사실은 방화사건이 무장대의 소행이었다면 그 누구도 이를 사전에 알 수 없을 터인데 오라리 방화 현장이 미군에 의해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입체적으로 이미 촬영 되어있어서 이 필름은 ‘제주도의 메이데이’로 명명돼 4·3을 공산주의자들이 벌인 폭동으로 조작하는데 이용되어왔다.


초토화 작전을 막기 위해 조병옥과 육탄을 던져 싸운 처절한 몸부림을 그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방화사건이 일어난 나흘 후인 5월 5일 ‘화평이냐, 유혈이냐’의 최고수뇌회의’가 열렸다. 장소는 제주중학교의 미 군정청 회의실이었다. 참가자는 미군정장관 딘 장군,  민정장관 안재홍,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경무부장 조병옥,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 제주도지사 유해진, 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 중령,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崔天), 딘 장군 전용통역관 김씨(목사출신)이었다. 이상 9명이 참가한 회의는 극비에 부쳐져 맨스필드 대령의 사회로 개최되었다. 먼저 경찰에서 설명하라고 하였다.


경찰을 대표하여 제주도 경찰감찰청장 최천씨가 상황설명과 건의를 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 폭동은 국제공산주의자에 의한 사전에 조직 훈련·계획된 폭동이며 군·경 대병(大兵)을 투입하여 합동작전으로 철저하게 토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송호성 장군에게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송 장군은 제주도 실정은 연대장이 자기보다 잘 아니 연대장이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송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군의 작전계획을 설명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건은 제주도민의 전통적인 배타성을 이용해 공산주의자·불평분자·밀무역자 등 각종 성분의 무리가 일으킨 도민폭동으로 본다. 직접적인 도화선은 밀무역 자와 경찰간의 마찰이다. 폭동자 수가 수만으로 증가된 것은 경찰이 초동의 대책과 작전에 실패한데서 기인된 것이다. 실제 무장한 인원은 3백 명 이내로 보며 나머지는 여러 가지 불가항력으로 인한 동조자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①적의(敵意)를 가진 폭도와 일반 민중동조자를 분리시켜, 폭도를 제주도민으로부터 고립시켜야 된다 ②그러기 위해서는 무력위압과 선무귀순 공작을 병용하는 작전을 전개하여야 된다. 일방으로 회유와 선무를 하며 응하지 않는 자는 토벌하는 것이다 ③이 작전의 방해요소는 경찰의 기강문란이며 이것이 폭도증가의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전 제주도경찰을 나의 지휘 하에 달라. 작전의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서도 이 것이 꼭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나의 보고와 건의가 정확하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물을 제시 하겠다 하면서 준비하였던 물적 자료와 사진첩을 제시하였다. 사진첩을 보자 (사진첩에는 맨스필드 대령이 영문으로 상세한 설명을 기입해 놓았다) 딘 장군은 흥분하여 안색이 붉어지며 즉석에서 나의 건의를 채택하는 동시에 경찰을 나에게 배속시키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진첩을 조병옥씨에게 던져주면서 불쾌한 어조로 “닥터 조, 이 것 어떻게 된 일이요, 당신의 보고 내용과 전연 다르지 않소”하고 그를 노려보았다. 장내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조병옥씨는 사진첩을 두루 살피면서 당황한 기색이더니 갑자기 단상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우리말로 자기가 설명하겠노라고 인사를 하고는 그 다음은 유창한 영어로 열변을 토하기 시작하였다. 조병옥씨는 처음에는 영어로 한 말을 자신이 통역하는 식으로 설명하다가 열을 띠자 우리말을 치워버리고 영어로만 떠들었다. 영어를 모르는 안재홍씨·송호성 장군·유해진 도지사는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듣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조씨는 연대장의 설명과 사진첩 등 증거물이 전부 허위조작된 것이며 (사실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맨스필드 대령과 드루스 대위가 작성한 것인데) 경찰에 대한 중상모략이라고 극구 부인했다. 그러다가 난데없이 나에게 손가락질 하면서 “저기 공산주의 청년이 한 사람 앉아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국제공산주의가 무서운 조직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민족주의를 앞세워 각지에서 폭동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나중에는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국제공산주의자들의 상투수단이요”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닥쳐라!”하고 고함을 질렀다. 딘 장군은 나를 제지하며 연설 방해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조병옥씨는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며 “민족주의의 가면을 쓴 청년들이 먼 외국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현재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연대장이 그런 청년이요. 우리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저 청년의 아버지는 국제공산주의자이며 소련에서 교육을 받고 현재 이북에서 공산당 간부로 열렬히 활약하고 있소. 저 자는 자기 부친의 교화를 받고 공산주의자가 되었으며 자기 부친의 지령에 의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이요”하면서 나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의 부친은 내가 다섯 살 때 이미 작고한 분이었다.



딘 장군은 조병옥씨가 나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라고 그럴싸하게 설명하자 깜짝 놀라며 의심에 찬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다. 맨스필드 대령까지도 의외라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내가 공산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판이었다. 나는 격분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단상에 뛰어올라 연설하는 조병옥씨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흥분한 나머지 주먹으로 조병옥의 복부를 친 후 멱살을 잡고 내 동댕이치려고 하였다(나는 유도 3단이었다). 그러나 조 박사는 의외에도 힘이 장사였다. 당시 50세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단상에서 격투가 벌어졌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 조 박사는 숨을 못 쉬고 비명을 지른다. 최천씨가 말리러 올라왔으나 나의 발길질에 급소를 차여서 그도 비명을 지르며 나뒹군다. 딘 장군이 송호성 장군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조병옥씨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였다기에 애국자인 줄 알았더니 자기의 죄상이 드러나니까 무고한 나를 하필이면 공산주의자로 모느냐. 취소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하며 필사적으로 덤벼들었다.


송 장군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연대장! 누구에게 폭행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고함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호령호령했다. 돌아가는 내용의 대강을 눈치 챈 안재홍 민정장관은 “연대장! 손을 놓으시오. 폭행을 멈추시오. 외국사람들이 우리를 야만인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역시 소리만 지를 뿐 단상에 올라와 말릴 뜻은 없었다. 유해진 지사가 단상에 올라와 나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노령이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미친 듯이 덤볐다. 순식간에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딘 장군은 싸움은 말리지 않고 떠들고만 있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이 지금 무어라 말하고 있냐고 통역관 김씨를 옆으로 불러 물었다. 그런데 이 자의 통역이 또 괴변이다. 그 경황 중에도 내가 단상에서 듣자니 이 자는 딘 장군에게 안재홍씨와 송 장군이 연대장에게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나쁜 놈”이라고 욕을 하고 있다고 터무니없는 통역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서 두 손으로 조 박사의 넥타이를 붙잡은 채 단하로 끌어 내리면서 김 통역관에게 발길질을 했다. 입을 걷어찬다는 것이 빗나가서 그만 그 자의 음부 급소를 걷어찼다. 김 통역관은 비명을 지르면서 마루 위에 나뒹군다. 놀란 딘 장군은 급히 회의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가더니 대기 경호 중이던 미군헌병을 불러들여 장내 질서를 정리하라고 명령했다. 수 명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중 2명의 MP가 양쪽에서 나의 두 팔을 붙잡아 조 박사에게서 떼어놓고는 나를번쩍 들어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두 팔을 잡고 꼼짝 못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장내의 소란은 끝났다.


모두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으므로 딘 장군은 “콰이엇, 콰이엇(조용히 하라)”하면서 진정하라고 명령하였다. 2~3분간의 침묵이 있은 후 딘 장군은 조병옥씨에게 단상에 올라가 설명을 계속하라고 하였다. 조 박사는 이번에도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나도 고함을 지르며 욕설로 맞섰다. 딘 장군은 다시 “콰이엇”을 연발한다. 안재홍씨도 “연대장! 조용히 하시오”하고 말렸다. 송호성 장군도 고함 고함을 지르며 “이놈! 이놈!” 호령했는데 그 대상이 연대장인지 조병옥씨인지 분명치 않았다. 나는 그것이 조병옥씨를 향한 욕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안재홍씨가 탁자를 두드리며 “아이고 분하다, 분해!  연대장 참으시오!  이것이 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힘을 빌려서 해방이 된 때문에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이오. 연대장! 참으시오!”하면서 방성통곡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울음을 한참동안 그칠 줄을 몰랐다. 장내는 순식간에 숙연해지고 안재홍씨의 통곡소리만 들렸다. 조병옥씨도 연설을 중지하고 나도 욕설을 멈췄다. 딘 장군은 안재홍씨와 조병옥씨의 안색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영문인지를 살핀다. 그러다가 벌떡 일어서서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해산 이오”하고 고함을 지르듯 선언하고는 문을 열고 총총히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한참 있다가 조병옥씨가 그 뒤를 쫓아나갔다. 회의장에는 안재홍씨와 송호성 장군 그리고 나 3인만 남게 되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안재홍씨는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비극 이오”하는 말만 되풀이할 뿐 다른 말이 없었다.


미군정 최고수뇌회의가 아무런 결론 없이 유회된 다음날 오전 11시경 제주 읍 소재 연대임시본부 겸 연락소(일제 때 금융조합 건물)에 난데없이 경비대 총사령부 고급부관인 박진경(朴珍景) 중령이 도착하였다. 나는 최고참모의 방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의 후임 연대장으로 오늘 아침에 명령을 받고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각 본부 장병들을 집합시켜 연대장의 이 취임식을 끝내고 나자 서둘러 상경준비를 하였다. 그런 나에게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을 통해 뜻밖의 상부의 명령이 전달되었다. ‘박진경 중령은 연대장으로서 명령권을 가지고, 김익렬은 연대장의 고문이 됨과 동시에 작전지휘를 책임진다.’는 것이었다. 작전의 결과에 대한 책임도 내가져야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비정상적인 지휘계통과 책임한계였다. 정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당시 사정으로서는 이해됨직한 일이기도 하였다. 신임 박진경 중령은 소위 임관 후 그 때까지 고급부관직을 지낸 행정장교 출신이므로 부대 작전지휘는 경험이 없었다. 그런 그가 당장 연대지휘를 맡는다는 것은 사실상 곤란한 문제였다. 또 지금과 같이 막중한 시기에 제주도의 지리 지형에 밝고 부대의 파악과 지휘 등 군사적인 유경험자인 나를 경질하는 것은  대단히 불안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 변칙적인 임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표면적인 명분상으로는 당시 미군정하의 제1인자였던 조병옥씨를 폭행한데 대한 문책 경질이었지만 내용은 그 것만은 아니었다. 딘 장군은 박진경 중령에게 극비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제주도 전역에 대한 초토작전 명령이었다. 현지 연대장인 나와 맨스필드 대령은 절대 반대해 온 작전이었다. 초토작전은 인도적으로 결코 허용될 수 없고 전시에도 명령하거나 묵인한 사령관은 전범으로 처형을 면키 어렵다. 하물며 전후(戰後) 평화 시에 자기가 군정 하는 영토내의 국민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다가 세상에 알려지면 그 결과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전범재판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는 인도적으로 처형될 것이다. 더구나 제주도 군정장관 맨스필드 대령과 내가 한사코 초토작전을 반대하므로 명령으로 강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딘 장군은 자기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여줄 연대장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


개인적으로는 박진경 중령과 나는 고향 친구로 절친한 사이였다. 박중령의 결혼식 때 내가 들러리를 설만큼 가까웠다. 박중령은 일제 때 대판(大阪)외국어학교 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였다. 구 일본군 소위로 제주도에서 근무한 경력도 있었다. 나는 전투준비를 마치고 전투명령을 대기 중이던 부대로 신임 박진경 연대장을 안내하여 거기서 또 한 차례의 이취임 식을 거행하였다.


박진경 연대장은 취임식 인사 중 연대장의 통솔과 작전방침을 밝히면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부대통솔 경험이 없는 철부지의 이 실언에 대하여 나무라고 다음부터는 중지하도록 강력히 충고하였으나 박중령은 소신대로 자기의 의지를 부대 장병들에게 훈시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오히려 나에게 대들었다. 그는 각 부대를 순방하면서 예의 훈시를 계속하였다. 이 실언이 장차 박진경 중령이 불행을 당하는 중대한 원인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실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①자신의 혈통에 관한 소개가 우선 실수였다. 자기 부친은 친일파들의 정치집단이었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중요간부였다고 소개했다. 이 필요 없는 소개를 왜 해야만 했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자기는 절대로 공산주의자와는 적대관계라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②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 - 다시 말해서 초토작전을 감행하겠다는 의지의 발표였다.


고급지휘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실언이었다. 이런 언행은 부대지휘 경험이 없는 참모출신이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출세한 장교들이 흔히 범하는 과오다. 그것은 군대는 명령만 하면 복종한다는, 통솔의 기술을 무시하는 환상에 기인한다. 군인들은 이해관계에 얽매인 조직체는 아니다. 군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다는 충성심으로 결속된 조직체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길이라는 대의명분 없이는 귀중한 자기 목숨을 희생하려고 생각지 않는 것이 군인이다. 상관의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위하여 그릇된 사병(私兵)놀이를 하지 않는 것이 군대와 시정 폭력조직과 다른 점이다. 거듭 말하지만 군인은 목숨을 바칠만한 명분 -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대의가 있어야 복종한다. 이런 사실을 박진경 중령은 망각하고 군인은 무슨 명령이라도 복종하는 줄 착각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박진경 중령과 나는 다음 날부터 토벌에 관한 상의를 시작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작전에 관한 개념이 서로 달라 의견이 상통할 리가 없었다. 불과 1시간도 못되어 의견충돌이 생겼다. 박중령은 자기의 임무수행에 방해가 되니 제주도를 떠나 달라고 하였다. 나도 화가 나서 떠나겠다고 내뱉고는 그 길로 비행장으로 향하여 총사령부로 직행하였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내용이다.



그 후 박진경 연대장은 부하의 손에 의해 암살당한다. 부임 44일(6월 18일) 만이다. 그의 죽음은 제주도를 죽음의 광풍으로 내몰았다. 미군정은 후임 연대장으로 최경록, 송요찬, 함병선을 임명한다. 이들은 모두 일본군 준위 출신으로 만주 지역에서 중국군이나 항일 빨치산과 싸웠던 전투 경력이 있는 분들이다. 4·3위원회에 신고 된 희생자 대다수가 이들이 연대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발생했다.


김익렬장군의 동상을 건립 참군인의 표상으로 삼자



제주도 충혼묘지 입구에는 박진경 대령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고향인 경남 남해군 군민공원에도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이 비문에는 “북괴는 제주도를 공산기지화 설정 1948년 4월 3일 무장폭동을 봉기 양민학살폭동을 감행하자 딘 소장은 공(公, 박진경)을 11연대장으로 보임하였다. 제주도민의 생명보호와 사태수습 명을 받은 공(公)은 불과 2개월 내 소위 공산반란 해방군 주력을 섬멸한 전공에 감탄한 딘 소장은 대령으로 승진시켰다. 그 후 산발적 폭동공비잔당 소탕 작전 중 불행히도 적의 흉탄에 장렬히 산화하셨다’라 써있다. 그는 지금도 창군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라 써있다.


그러나 자국민을 초토화하라는 미군정의 명령을 거부 국민의 안녕을 지키려 몸부림쳤던 진정으로 자랑스러운 군인 김익렬 연대장의 추모비나 동상은 그 어디에도 없다.


4.3사후에라도 그 책임을 엄격히 묻고 이를 교훈삼아 전장윤리 교육을 철저히 실시했다면 그 후에 일어난 여순 사건과 지리산 주변의 수많은 비무장 민간인 학살, 6.25 이전 예비검속에 의한 보도연맹학살 등 동족 살해 행위를 최소화 할 수 있었을 것이고 광주학살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지금 군에서는 어떻게 교육하고 있을지? 진정한 군인 김익렬 장군의 동상을 육사 교정에 세우자. 그의 정신을 본받아 국군의 미래 희망인 젊은 장교들의 시대에는 아(我)가 비아(非我)를 반드시 극복 승리하는 그런 세상이 되게 하자


(평화재향군인회 상임대표 표명렬 pcorea.net)  











군 달라져야 한다 개혁 외쳐온 표명렬 예비역준장 <한겨레 홍세화와의 대화>
조문기 선생님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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